해마다 4월 초에 열리는 프로야구의 시즌 개막은 연기되었다. 파란 잔디가 깔린 그라운드에서 배트를 힘차게 휘두르고, 포물선으로 날아가는 공을 쫓아 달리는 야구선수들의 군더더기 없이 날렵한 플레이를 볼 수 없다는 것도 상실감을 안겼다. 아마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하루치의 원고를 다 쓴 뒤 4월의 야구장에서 느긋하게 선수들의 아름다운 플레이를 즐겼을 것이다. 그 작고 소박한 기쁨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어디 그뿐인가! 상반기 강연들이 줄줄이 취소되고 올해 내 수입은 반 넘게 깎일 게 분명하다. 산업 전 분야가 가동을 멈추고, 소비심리는 위축되었다.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은 매출 급감으로 폐업 위기로 내몰렸다. 초중고교의 개학과 등교가 미뤄지면서 자동적으로 급식 납품이 끊겨 남는 우유를 내다버릴 처지다. 정부는 국민 모두에게 재난지원금을 뿌린다고 한다. 집 안에 웅크려 있는 동안 좌절의 우울감에 시달렸다. 더 암울한 사실은 우리는 코로나19의 대유행 이전의 일상으로 다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런 와중에 윌리엄 B. 어윈의 ‘좌절의 기술’을 읽었다. ‘좌절의 기술’이라니! 좌절은 실패고, 불행이며, 슬픔의 원인이 아닌가! 어윈은 “인생에서 좌절은 피할 수 없고 좌절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만을 바꿀 수 있다”는 전제를 깐다. 사는 동안 누구나 크고 작은 좌절을 겪는다. 좌절감의 실체는 욕망의 무화(無化)나 유예에서 오는 정서적 손실감이다. 욕망이 간절할수록 좌절에 따른 낙담도 커진다. “좌절과 욕망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무언가를 좌절로 여길지 말지는 당사자가 무엇을 원하는지에 달려 있으며, 그 좌절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그 사람이 그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느냐에 달려 있다.”(어윈, ‘좌절의 기술’) 사실 좌절은 불행과 죽음의 자매다. 욕망의 존재로써 좌절을 피할 수 없다면 대응하는 태도를 바꿔야 할 것이다.
고대 철학자 세네카는 “우리는 나쁜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나쁜 사람들이다”라고 말한다. 세상에는 더 나쁜 사람과 덜 나쁜 사람이 존재한다. 더 나빠지지 않으려고 애쓰며 더 나쁜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은 파도처럼 끝없이 다가오는 좌절과의 전투다. 사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자주 좌절의 수납과 극복 사이에서 진저리를 쳤던가! 죽음, 이혼, 이별들, 병고(病苦), 예기치 않은 사고, 진학이나 취업의 실패… 들이 다 슬픔을 불러오는 경험이다. 좌절을 겪을 때마다 우리 안에서 울려 퍼지던 교향악은 그치고, 내면의 왈츠는 멈춘다. 늘 겪는다는 점에서 좌절은 삶의 상수(常數)다. 그것은 우리 마음대로 피해지는 게 아니다. 좌절은 행위에 대한 도덕적 단죄의 결과가 아니다. 그것은 궂은 계절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 그만큼 작은 불행이다. 어윈은 좌절에 직면해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그 심리 매뉴얼을 스토아주의 철학에서 찾는다.
애초에 진정한 삶을 향한 갈망이 타오르지 않는다면 좌절도 없다. 열락과 지복이 넘치는 미지의 종착지로 우리를 데려가겠다는 갈망이 꺾일 때 인간은 좌절한다. 좌절은 열망의 탕진과 심리적 시련을 동반한다. 좌절은 반드시 비용을 청구한다. 첫째는 좌절로 인해 생긴 물리적 비용, 둘째는 좌절이 촉발한 정서적 고통이 그것이다. 좌절하는 자가 의기소침해지고 인생을 공회전시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좌절에 직면할 때 그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하라. 좌절의 경험을 성찰하라. 실패에서 무엇인가를 배워라. 그건 야구의 파울볼이나 마찬가지다. 파울볼로 타석은 끝나지 않는다. 당신에게는 아직 타석에 들어서서 투수의 볼을 칠 기회가 있다. 그 기회를 붙잡아라. 좌절은 부정적 감정을 불러온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말하는 슬픔의 다섯 단계가 그것이다. 분노, 부정, 타협, 우울, 수용으로 이어지는 그 다섯 단계는 정서적 시련이자 역경이다. 슬픔은 존재를 침식하고 분노는 우리를 파괴한다. 슬픔도 분노도 방임하지 말라. 코로나19의 대유행은 개인의 것보다 큰 대규모의 좌절이고 집단적 불행이다. 하지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차라리 좌절할 때 평정심을 되찾고 슬픔이 자신을 단련하게 하라. 아직 당신의 시간은 남아 있다. 좌절은 우리 안에서 새롭게 뛰는 맥박이다. 두려움에 떨지 말고 좌절의 잔을 높이 들자. 자, 좌절을 들이켜자, 건배!
호라티우스는 우리 생의 마지막이 언제일지 점성술에 묻지 말라고 한다. 겨울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듯이 좌절이나 불행도 한 번으로 끝나는 법은 없다. 파도는 또 다른 파도를 물고 온다. 인생은 덧없고 슬프며 짧다. 그 짧은 인생에서 긴 욕심을 품고 애쓰지 말라. 긴 욕심은 필경 좌절의 고통으로 이어진다. 슬픔으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 세월은 우리를 시샘하며 흐르고, 기회는 마냥 기다려주지 않는다. 호라티우스의 ‘카르페디엠’ 마지막 구절은 이렇다. “내일은 믿지 말라. 오늘을 즐겨라.” 오늘의 행복을 내일을 위해 유예시키지 말라. 당장 손에 쥘 수 있는 행복을 미루는 것은 현명한 태도가 아니다. 우리 운명이 내일 어떻게 바뀔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 이 순간의 삶만이 진짜 우리의 몫이다. 코로나19로 생긴 집단적 우울도 지나가리라. 꿈과 희망을 포기하지 말라. 좌절에 꺾이지 않을 때 우리 안의 회복탄력성은 단단해진다. 좌절을 자아 성장의 기회로 전환할 때 그것은 인생의 훌륭한 자양분이 될 수 있으리라.
“누구도 자족한 섬은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대륙의 한 조각, 큰 덩치의 한 부분이다. 만일 흙덩이가 하나가 파도에 씻겨나간다면, 유럽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마치 갑(岬)이 씻겨나간 것처럼, 마치 그대 친구의 또는 그대 자신의 집이 씻겨나간 것처럼. 내가 인류와 연관되었으므로, 어떤 사람의 죽음도 나를 작게 만드느니, 결코 사람을 보내지 말라,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알아보라고. 그것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삶의 힘든 고비에 영국 시인 존 던의 ‘드러나는 사건들에 관한 기도들’을 떠올리며 위로를 받는다. 그걸 가만히 소리 내어 읽으면 꺼져가는 불꽃이 살아나듯 가슴이 더워진다. 시인은 누구도 바다 위에 홀로 떨어진 채 섬 같이 고립한 존재가 아니라고 말한다. 인류 하나하나는 연결된 대륙이다. 누구 한 사람이라도 사라진다면 대륙은 “갑(岬)이 씻겨나간” 듯이 줄어든다. 누군가 죽는다면 내 존재도 그만큼 작아진다. 부디 죽지 말고 살아있으라. 살아남는 건 좋은 일이다. 살아 있어야 좌절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나 알아보라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깊은 어둠을 뚫고 기적 같이 열린 이 아침에 댕댕댕 울리는 종은 바로 당신을 위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