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나 국가는 가난한 장발장들에게 차갑고 냉정해요. 법에는 인간의 시선이 보이지 않죠.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무관심한 것이 현실입니다. 장발장은행은 차갑고 무관심한 시선을 받아온 장발장들이 세상의 냉혹함을 씻어내려고 만들어졌습니다."
기자가 장발장은행을 찾은 25일. 5년전 오늘은 장발장은행이 문을 연 날이다.
'돈 없는 은행'. '돈을 갖고 있지 않은 은행'. '이자놀이를 하지 않는 은행'. 하지만 이 시대의 장발장들에게 손을 내민 곳. 그곳이 바로 장발장은행이다.
장발장은행은 한 마디로 벌금형을 선고 받았지만, 낼 돈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교도소에 갇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곳이다. 인권연대를 중심으로 10여 명의 인원이 "우리부터 스스로 돈을 모아 생활형 범죄로 교도소에 가야하는 사람들을 돕자"라는 취지에서 시작했다.
초창기 사업 자금은 참여자 10여 명의 모금액과 1000만 원의 기부금. 그리고 5년이 지난 현재, 총 785명의 시민이 장발장은행으로부터 14억 원가량의 대출을 받고 벌금을 납부하면서 노역을 대신할 수 있었다. 모든 재원은 시민들의 후원으로 만들었다.
현재 대출자 중 416명이 대출금을 상환하고 있고, 이중 125명이 모두 갚았다. 지금까지 상환금은 약 3억6000만 원에 달한다.
◇장발장은행 대출심사 통과 비율 20% 불과…"심사기준 핵심은 죄질과 집안 형편"
"장발장은행은 돈도 없고 몸으로 때울 처지도 못 되는 사람들의 신청을 받아서 그 벌금을 담보 없이, 이자 없이, 신용조회 없이 빌려주는 곳입니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대출신청서와 주민등록등본, 신분증 사본, 약식명령서 혹은 판결문 사본(범죄사실 내역 포함), 벌금액 고지서 사본을 이메일이나 팩스, 우편 등으로만 신청을 받으며, 방문 신청은 받지 않는다. 이렇게 접수된 대출신청은 접수 후 20일(근무일 기준) 이내에 심사를 마치고, 신청인에게 대출 여부를 통보한다. 대출이 결정되면 즉시 대출을 진행한다.
지원 금액은 최대 300만 원이 한도다. 별도 이자는 없으며, 대출 기간은 6개월 거치에 1년간 균등 상환이다. 일반적으로 은행에서 대출심사를 받으려면 담보나 신용조회, 소득 등을 살펴보지만 장발장은행에서는 이런 것을 대출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장발장은행의 대출심사 기준은 '사람'에 있다.
홍세화 은행장은 "대출 신청자가 심사를 통과하는 비율은 20%에 불과해요. 재원이 한정적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다 혜택을 드릴 수가 없죠"라고 말했다. 그는 "대출심사에서 몇 가지 원칙이 있어요. 우선 성폭행이나 가족을 폭행했거나 음주운전, 대포통장이나 보험사기 등 죄질이 무거운 것은 우선 배제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지와 집안 형편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한부모가정인데 홀로 노부모를 돌보는 상황에 있거나, 반대로 홀로 어린 자식을 돌보는 상황에 있는 경우는 최우선적으로 대출해준다. 또한, 20세 안팎의 사회초년생도 교도소 생활을 겪지 않도록 우선적으로 배려한다.
◇한국의 벌금형 제도 "총액벌금제→일수벌금제로 바뀌어야 해요"
홍 은행장의 목표는 아이러니하게도 하루라도 빨리 은행이 문을 닫는 것이다. 그냥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법 제도가 바뀌어서 장발장은행이 필요 없는 세상을 원하는 것.
"장발장은행이 처음 생긴 지 오늘(25일)로 딱 5년이 됐어요. 우리가 장발장은행을 처음 설립할 때부터 목표는 뚜렷했죠. '되도록 빨리 문을 닫자'였어요. 문을 닫는다는 의미는 뭐냐. 돈이 없다는 이유로 벌금도 못 내서 자유를 구속 받는 분들은 적어도 없어져야 한다는 게 바로 '장발장은행이 문을 닫는다'는 의미일 겁니다."
홍 은행장은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일수벌금제'로 불리는 소득·재산 연동형 벌금제 도입이라고 역설했다.
국내에서는 특정 범죄에 대해 동일한 액수의 벌금을 부과하는 '총액벌금제'를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같은 범죄를 저지른 벌금 대상자라도 각각의 경제적 수준에 따라 닥치는 충격이 다른 게 사실이다. 재벌에게 벌금 300만 원은 별 영향이 없겠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벌금 300만 원은 몇 달 치 생활비다. 때문에 경제적 빈곤층은 빈곤 때문에 생계형 범죄를 저지르고, 벌금형을 선고받으면 이를 감당치 못하고 '환형유치'를 통해 노역장에서 몸으로 갚는 선택을 하게 된다.
장발장은행이 탄생한 이유도 경제적 빈곤층인 '장발장'을 위해 만들어진 셈. 결국 제도가 바뀌어야 장발장은행이 문을 닫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럽의 경우는 우리나라처럼 총액벌금제를 하지 않고 일수벌금제를 도입했죠. 벌금일수는 동일하게 적용하지만, 여기에 그 사람의 소득·재산을 곱하는 거죠. 결과적으로 소득이 많은 사람은 벌금액수를 높게, 소득이 적은 사람은 벌금액수를 낮게 차등 적용하는 것입니다. 일각에서 피고인의 재산 상태를 조사할 현실적 방안이 마땅치 않다는 점을 들어 일수벌금제를 도입하기 어렵다고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건강보험료를 소득에 따라 내잖아요. 이런 것을 기준으로 매기면 되는데, 아직도 도입하지 않는 건 결국 다 핑계죠."
일수벌금제는 예를 들어 소득 상위 1%와 70%가 혈중알코올농도 0.14%의 음주운전을 했을 때, 벌금일수는 동일(70일로 가정)하게 적용하지만 1일 벌금액수는 각각 30만 원, 5만 원으로 차등 적용한다. 이 경우 소득상위 1%는 2100만 원을, 소득상위 70%는 350만 원을 벌금으로 내야 한다.
그는 일수벌금제를 적용해야만, 진정한 법의 평등이 이뤄진다고 주장했다. 이미 우리사회에서도 기존의 총액벌금제와 벌금형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이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
지난 2014년 3월 대주그룹 허재호 회장의 '황제 노역'이 대표적이다. 당시 허재호 회장은 400억 원대의 탈세 및 횡령 혐의로 구속됐지만, "벌금을 낼 돈이 없다"면서 하루 5억 원씩을 탕감받는 구치소 노역을 했다.
홍세화 은행장은 "허재호 회장은 254억 원의 벌금에 대해 1일당 5억 원의 환형유치 노역 판결을 받았죠. 단 5일만에 25억 원이라는 벌금을 탕감한 겁니다"라며 "하지만, 당시 보통사람들은 노역을 통한 하루 일당이 5만 원 수준이었어요. 같은 사람인데도 돈 있는 사람과 돈 없는 사람의 자유를 위한 일당의 차이가 1만 배에 달한 셈이죠"라고 지적했다.
장발장은행은 기자가 찾은 25일 경찰청과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을 하겠다는 것이 핵심이다. 홍세화 은행장은 "경찰청과의 협약으로 경미한 범죄자나 소년 범죄의 경우 전과자로 만들지 않고 사회 복귀를 돕는 데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끝으로 그는 장발장은행에 대한 관심을 당부했다.
"장발장은행은 시민의 성금으로 운영됩니다. 정말 5년간 안타까운 사연을 지닌 사람들이 우리를 찾아 어려운 상황을 이겨나갔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 시민 여러분이 여윳돈이 생겼을 때 장발장은행에 성금을 보내주시는 것도 좋고, 인권연대에 가입해서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이들에 대해 꾸준한 관심을 기울여줬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