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반수가 바뀌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해서 한은법이 바뀐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네 명의 임기 종료가 오는데 네 명 중에 몇 명이 교체될지는 잘 알 수 없다. 네 명이 다 바뀌는 것을 전제해 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는 2일 신년을 맞아 서울 중구 태평로 한은 본점 기자실에서 가진 기자들과의 다과회에서 이같이 말했다. 올해 네 명의 금융통화위원이 무더기로 교체되면서 통화정책 단절 가능성과 이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를 어떻게 취할지를 묻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네 명이 모두 교체되는게 아닐 가능성도 있는 것이냐는 연이은 질문엔 “금통위원 임명은 대통령 인사권이다. 노코멘트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다.
한은 금통위원 연임 가능성이 급부상하고 있다. 다름 아닌 이주열 총재가 직접 이같은 언급을 했다는 점에서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실제 이같은 발언을 빌미로 한은 정책결정에 민감한 채권시장이 반응하기도 했다.
다만, 이 총재 발언이 실제 실현될지는 미지수다. 그 스스로도 언급했듯 최종 인사권자는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 왜 나왔나? 총재 추천 이일형 위원 가능성에 무게 = 이명박(MB) 대통령 재임 당시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추천 위원을 2년간 공석으로 놔두면서 금통위원의 무더기 교체라는 문제가 반복되기 시작했다. 실제 2012년 4월 네 명의 위원이 한꺼번에 교체됐고, 2016년 4월과 올해 4월까지 총 세 번에 걸쳐 무더기로 금통위원이 교체되는 상황을 초래하게 됐다.
이같은 문제를 풀기위해 2018년 3월13일 한은법을 개정했다. 개정된 한은법에 따르면 제15조 1항은 당연직을 제외한 금통위원의 임기를 ‘4년으로 하며, 연임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2항은 총재와 부총재를 제외한 위원의 경우 ‘전임위원의 임기만료 즉시 임명되지 아니한 위원의 경우 전임위원의 임기만료 즉시 개시된 것으로 본다’고 정하고 있다. 아울러 부칙을 통해 이 법 시행후 최초로 임명되는 한은 총재와 금융위원회 위원장 추천 위원의 임기를 ‘3년으로 한다’고 정했다.
한은 공보관측은 이 총재 언급을 두고 법상 연임이 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한 원론적 답변이라며 진화에 나섰다. 다만 총재라는 중량감을 감안한다면 그의 말을 공보관측 해명 정도로 흘려버리긴 어렵다.
금통위원은 추천기관의 추천을 받아 대통령이 임명한다. 현재 당연직인 총재와 부총재를 제외한 5명의 위원은 한은 총재와 기획재정부 장관, 금융위원장, 대한상의 회장, 전국은행연합회 회장이 각각 한명씩 추천하고 있다.
이같은 추천기관 추천 절차는 그간 요식행위에 그쳐왔다. 실제 MB 정부 시절인 2011년 9월 한은 국정감사에 출석한 당시 손경식 대한상의 회장은 대한상의 추천 금통위원 임명이 장기간 미뤄지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정부 의견을 못 듣고 기다리다가 보니 시일이 걸렸다”고 답했다. 정부가 점지해주길 기다린 것이냐는 질문엔 “지금까지 관행이 그랬다”고 밝힌 일화는 유명하다. 2014년 5월 함준호 위원 임명 당시에도 은행연합회 고위관계자는 “청와대가 낙점해주면 절차를 밟을 뿐”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다만 한은 역사상 금통위원이 연임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우선 대통령이 인사권을 발휘하는 자리라는 점에서 가까운 측근 몫으로 활용돼 왔던 자리다. 박근혜 정부 당시 임명된 현 신인석 위원의 경우 박근혜 대통령인수위원회 경제분과 위원을 역임했던 인물이다.
또, 경제학자라면 한번쯤 꿈꾸는 자리인데다,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치지 않는 자리라는 점에서 정·관계에서도 노리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금통위원 임명 시즌이면 금통위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 청와대 앞부터 (한은이 있는) 남대문을 돌아 다시 청와대 앞까지 줄을 선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다.
◇ 금통위원 연임시 인하시기 5월도 추가 = 2일 채권시장은 이 총재 언급을 빌미로 강세장을 연출했다. 통화정책에 민감한 통화안정증권(통안채) 2년물과 국고채 3년물 금리는 각각 3.3bp(1bp=0.01%포인트)씩 하락해 초장기물(국고채20년~50년물 각각 3bp 하락) 금리 낙폭보다 컸다. 채권금리는 가격과 반대로 움직인다는 점에서 단기물이 더 강했던 셈이다.
이는 기준금리 인하를 주장하는 비둘기파 위원인 조동철·신인석 위원들이 연임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아울러 금통위원 연임으로 통화정책 단절이 발생하지 않을 경우 5월도 추가 인하시점으로 거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간 올 상반기 중 추가 금리인하가 있다면 2월 가능성에 무게가 실려 왔었다. 금통위원 대거 교체와 국회의원 선거(총선) 이슈가 맞물리면서 2월 이외 시점이 마땅치 않았기 때문이다.
1월은 연초와 설 연휴가, 4월은 총선과 금통위원 교체가 겹친다. 5월은 교체된 신임 금통위원들의 첫 금통위다. 3월과 6월은 금통위가 없는 달이다. 실제 1999년 기준금리 결정으로 통화정책이 변경된 후 연초와 설날, 금통위원 교체, 총선이 있던 달에 금리가 변경된 적은 단 3번에 그친다. 이들 중 두 번(2000년 2월, 2011년 1월)은 인상이었고, 인하는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1월이 유일하다.
비슷한 사례로 이주열 총재 연임 결정이 이뤄졌던 2018년 초가 있다. 당시 금리인상 기조 속에서 총재 교체로 인해 늦춰질 것으로 예상했던 인상 속도가 연임으로 빨라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당시 이르면 연임 직후인 2018년 4월, 늦어도 5월엔 인상이 이뤄질 것이란 전망이 확산했다. 이 총재도 두고두고 당시 인상을 결행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은은 현재 신중하지만 추가 금리인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중이다. 2일 이 총재도 “경기와 물가를 보면 완화기조를 가져가야 한다. 금리로 대응할 여력은 있다”고 말했다. 다만 추가 인하 걸림돌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많은 것을 봐야 한다. 물가안정이 주된 목표이긴 하나 금융안정도 중요하다. 경기도 봐야 한다. (추가 인하 시) 효과와 부작용도 있다. 셈법이 복잡하다”며 그야말로 복잡한 속내를 드러냈다.
경기에 대해서는 희망 섞인 낙관론을 내놨다. 이 총재는 “올해 미·중 분쟁도 개선 조짐을 보이고 있고, 반도체 값도 시기를 가늠키 어려우나 올해 중반 정도쯤 가격상승을 예상할 수 있겠다”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