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힐의 대표작 ‘관람자’(Viewer·1996)다. 미국에서 활동하는 비디오아티스 게리 힐의 아시아 첫 대규모 개인전이 내년 3월 8일까지 경기 수원시립미술관에서 열린다. 2019년 국제전 ‘게리 힐: 찰나의 흔적’(Gary Hill: Momentombs) 전이다.
게리 힐은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 인간을 규정하는 핵심 요소인 신체 그리고 인간이 바라보는 이미지와 인간이 속해 있는 공간의 형태 등을 주제로 다양한 매체 실험을 지속해왔다.
초기엔 작가로 활동하다 1970년대 초 소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바탕으로 영상과 텍스트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며 예술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1997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았고, 2000년대 이후부터는 비디오뿐 아니라 다양한 범주의 최신 기술로 작업하며 카르티에 재단의 작품 의뢰를 받았다. 2011년 아티스트 트루스트의 ‘예술 혁신가 상’을 수상했다.
이번 전시는 그동안 작가를 규정하던 ‘비디오 아티스트’가 아닌 열린 해석이 가능한 ‘언어 예술가’로서의 측면을 소개한다. 특정 매체나 틀에 갇힌 예술가가 아닌 동시대 현대미술의 정신을 대변하는 게리 힐을 조망하는 것이다. 1980년대부터 올해 최신작까지 그의 작품을 총망라한다.
게리 힐의 작품에서 이미지와 언어 그리고 소리는 시간에 따라 결합, 분리, 소멸과 탄생을 반복하는 양상에 착안해 만들어졌다. 이미지와 언어가 미끄러지는 ‘찰나’에 다른 이미지와 언어가 짝을 이루며 뒤를 잇는다. 그 ‘찰나’에 소멸된 이미지와 언어들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이 아닌 어떤 ‘장소’, 이를테면 무덤으로 표현되는 가상의 공간을 점유하며 새로운 의미와 결합하고 확장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보여준다.
‘잘린 파이프’(Cut Pipe·1992)는 두 개의 알루미늄 파이프가 약 25㎝ 간격으로 바닥에 일렬로 놓여있다. 한 개의 파이프에는 흑백 모니터가 설치됐고 다른 파이프 반대쪽 양 끝에는 스피커가 설치됐다. 이를 통해 영상과 함께 들려오는 말소리는 마치 파이프를 통과해 보이는 스피커로 나오는 느낌을 주고 스피커를 만지고 조작하기 위해 표면을 누르는 손의 영상이 두 파이프 사이의 틈을 건너 스피커 표면에 투사된다.
‘나는 그것이 타자의 빛 안에 있는 이미지임을 믿는다’(1991~1992)는 4인치 흑백 모니터와 렌즈가 설치된 일곱 개 원통형의 튜브들로 구성된다. 한 무더기 책들 위로 천장에 매달린 튜브들이 각각 다른 높이로 내려와 있다. 유일한 광원은 펼쳐진 책장 위로 비치는 이미지다. 이미지들은 크기가 각각 다른 책 크기들에 맞춰져 있으며 두 개의 얼굴, 두 개의 몸통, 두 개의 몸, 입, 손가락, 텍스트, 손들 그리고 의자 하나로 구성된다.
비디오가 비추는 텍스트들은 모두 모리스 블랑쇼의 ‘최후의 인간’에서 가져온 발췌문들이다. 중간에 커다란 손들이 의도적으로 천천히 움직이면서 지워내는 동작을 하고 관람객이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소리인 표면을 문지르는 둔한 소리를 만들어낸다.
전시 외에도 미디어 아카이브와 작가 인터뷰 영상 및 작가 소개가 담긴 국내외 도서를 비치해 전시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김찬동 수원시립미술관장은 “이번 전시는 언어에 대한 깊은 사유를 다양한 매체로 풀어내며 작품과 관객과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탐구한 작가 게리 힐의 40년간의 작품 세계와 현재를 만나보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