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모임에서 자기소개를 하던 대기업 중간간부 A 씨가 농담 삼아 던진 말이다. 모두가 웃으며 넘어갔지만, 저녁 술자리에서 이어진 3대 덕목에 대한 왈가왈부는 사뭇 진지했다.
자기가 한 일이 조금이라도 빛을 내면 적극적으로 자신의 공로를 상사들에게 내세운다. 계획대로 업무가 진행되지 않으면 협조부서 능력 부족이나 대외환경 탓으로 돌린다. 본인이 이바지한 바 없으나 전사적으로 큰 성과가 도출되면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숟가락’을 얹는다. 하다못해 야근했던 직원들에게 커피를 사주며 격려하고 응원했다는 점이라도 내세운다.
‘월급쟁이의 피할 수 없는 비애’라고 두둔하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참석자는 이런 동료나 선후배들이 ‘직장 내 암적인 존재’라고 목소리 높여 성토했다. 나름대로 근거도 명확했다.
우선 면피에 능한 직장인들은 조직 협력시스템을 망친다고 했다.
중견기업 부장 B 씨는 “조직은 무거운 돌의 하중을 서로 나눠 세월을 버티는 아치(arch)형 구조와 같은데, 서로 책임을 나누고 협력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자기 회사에서 영업 부진에 대해 면피로 일관하던 부장 한 명으로 인해 해당 부서가 아예 해체됐던 사례도 들었다. 생색내기나 묻어가기는 인사시스템을 무력화한다고도 했다.
대기업 C 차장은 “세 사람이 모이면 없는 호랑이도 만들어낸다는 삼인성호(三人成虎)의 경우를 봤다”고 전했다. 자신이 속한 팀이 대규모 수출 건을 따냈는데, 옆 팀의 한 간부와 직원들이 자신들이 수주 노하우를 전수해 줘 가능했다며 임원에게 틈만 나면 자랑을 해 인사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더라는 웃기면서도 슬픈 경험담을 털어놨다. 그는 “우리 팀에서는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후배들은 이후 인사고과시스템을 불신하게 됐다”고 했다.
소주잔이 몇 순배 돌아가더니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타박이 이어졌다. 3대 덕목을 가장 철저히 실천하고 있는 게 문재인 정부라는 지청구가 쏟아졌다.
공정경제를 이룬다며 대기업들을 쥐 잡듯 하더니 대규모 투자건만 있으면 격려한답시고 현장에 가서 얼굴을 내비치는 게 묻어가기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여당 국회의원들이 전국경제인연합회를 방문한 다음 날 노조에 사과할 정도인데 왜 대기업 투자에 정부가 숟가락을 얹느냐는 불만이다.
경제지표가 조금 호전되면 소득주도성장의 성과가 가시화되고 있다고 홍보하고, 악화하면 글로벌 경기 불황 탓으로 돌리는 것은 가장 좋은 생색과 면피의 표본이라고도 했다. 특히 세금으로 노인 일자리를 만드는 걸 욕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일자리의 양과 질이 모두 개선됐다고 발표하는 그 뻔뻔함은 어디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는 푸념도 깊어졌다.
산업계는 생존을 위해 구조조정에 피땀을 흘리고 있는데, 정부는 단 한 번도 위기를 인정해 본 적이 없다. 오히려 튼튼한 기초체력으로 여타 선진국과 비교하면 흔들림 없는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다고 자부한다.
‘총, 균, 쇠’ 저자로 유명한 재레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지도자들이 자국의 문제를 정직하게 평가하지 않으면 위기가 악화한다”고 했다.
“기다리면 소득주도성장 효과가 나타나 경기가 개선될 것”이라고 강조하던 장하성 전 청와대 정책실장은 주중 대사로 떠난 후 말이 없다. 노영민 청와대 비서실장은 한술 더 떠 “경제 상황이 실제로 좋아지고 있다”고 발언하기도 했다. 수출이 9개월째 감소 중이며 기업들은 국내외 생산라인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는데도 말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최근 “회장을 하며 20년 동안 이런 종류의 지정학적 위기는 처음”이라며 “30년은 갈 것으로 보여 적응하는 법을 찾아야겠다”고 고백했다. 과장도 왜곡도 아니다. 현실 직시이자 미래 통찰이다.
대선에서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에게 한 표 던졌다는 D 상무가 술자리를 마무리했다. “생색을 내든 면피를 하든 빨리 이 정부의 임기가 끝났으면 좋겠어. 그리고 회사 간부 중에 나 같은 사람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것 같아. 국가적인 불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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