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고(正) 옳음(義)은 사람 사는 세상의 윤리와 도덕이 추구하는 가장 보편적인 선(善)이다. 정권이 늘상 강조하고 있는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도 같은 뜻이다.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 자체가 정의다. 그렇다면 다시 되풀이한 ‘정의로운 결과’는 무엇이 그 실체인가.
결국 정의는 정권이 그 가치를 멋대로 규정해 독점하고, 내키는 대로 휘두르는 적폐청산의 칼로 변질됐다. 과거에 대한 적개심과 복수의 다른 이름이었다. 전직 대통령 2명과 대법원장, 그리고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감옥에 보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지금의 정의는 ‘내로남불’이고, 자신들의 불의에는 한없이 관대한 위선의 가면(假面)이 됐다. 새로운 적폐가 쌓이고 있는 것은 필연이다.
학문적 정의론의 대가인 존 롤스(1921∼2002)의 주장을 인용한다. ‘하버드의 성자(聖者)’로 불리면서 평등적 자유주의에 기반한 정의의 개념을 세운 인물이다. 10여 년 전 한국 사회에 ‘정의란 무엇인가’ 열풍을 몰고 왔던 마이클 샌델이 추앙하는 스승이다.
두 가지 원칙으로 요약된다. 첫째, 모든 사람은 광범위한 기본적 자유와 동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특권을 누리는 자리가 모두에게 개방되고,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기대될 때 경제·사회적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있다. 롤스는 “절차적 정의가 성립하는 경우, 올바른 결과에 대한 독립적 기준이 없으며, 공정한 절차를 제대로 따르면 그 결과도 정의롭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최소 수혜자’들에게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는 시스템을 강조했다. 자유와 공평한 기회가 전제될 때, 열심히 노력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부(富)와 소득, 권력이 평등해야 한다면, 그보다 공정하지 못한 것도 없다. 결국 정의의 본질은 ‘정당하고 합리적인 불평등’에 있다는 얘기다.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이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 나오면서 보름 이상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어디까지가 참이고 거짓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그의 딸의 논문, 진학, 장학금 등과 관련해 드러난 사실(fact) 하나만으로도 이 나라의 청년들에게 깊은 절망과 불신의 상처를 안기고, 교육 문제에 가장 민감한 우리 사회의 역린(逆鱗)을 건드려 열받게 했다는 점이다. 법의 잣대로 판단하기 이전에 도덕성과 윤리의 중대한 불의다. 아무리 좋게 보아주려 해도 그럴 여지가 조금도 없다. 그런데도 정권의 핵심에서 도덕적 담론(談論)을 주도해온 그는 제대로 해명하기는커녕, 처음엔 ‘가짜뉴스’라며 “불법은 없다”고 억지부리다 뒤늦게 국민들에게 사과했다. 말썽 많은 가족들의 사모펀드, 학교재단 등에서도 손 떼고 재산을 사회에 내놓겠다고 한다. 하지만 사안의 본질을 호도한 것이고, 그렇다고 흠결이 덮어질 수도 없다.
공동체의 정의는 정치가 개입할 때 위험해진다. 정치권력이 그릇된 신념과 도덕적 우위에 있다는 착각으로 선악(善惡)을 재단하면서, 자신들만 정의를 집행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 경우다. 그 기만적이고 독선(獨善)에 빠진 ‘나만의 정의’는 정치적 반대편에 있는 상대를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 만들고, 결국 사회를 황폐화시킨다. 잘못해 놓고도 뭘 잘못했는지 모른 채 오류와 실패를 인정하지 않는다. 선한 의도만 내세워 모든 수단을 합리화하면서 자신들의 불의에 눈감는다.
그래서 조 후보자에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토록 강조해온 당신들의 정의는 무엇인가? 기회는 평등했고, 과정은 공정했는가? 이게 정의로운 결과인가? 특권과 반칙 없는 세상이 이런 것인가? 그게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도 자신만이 개혁을 이뤄낼 수 있다며 “짊어진 짐을 내려놓을 수 없다”고 강변한다. 그 어이없는 오만과 뻔뻔함에 기가 질린다. 나는 더 이상 우리 사회의 정의를 믿을 수 없다. kunny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