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나 지금이나 한국인은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이란 생각을 한다. 한일 간 경제전쟁의 전운이 짙어가는 요즘 윤치호의 일기는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하는 가치가 있다.
1920년 2월 11일 일기에는 동소문을 향한 산보길에서 만난 북관왕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관우를 모시는 묘당인 이곳은 민비가 무당 진령군과 함께 거금을 들여 지은 건물이다. 수십만 원을 들인 민비가 무속에 빠져 북관왕묘를 지은 목적은 왕가의 영속성을 빌기 위함이었다. 윤치호는 이런 설명을 더한다. “그 똑똑하고 이기적인 황후가 물심양면으로 북관왕묘를 섬긴 것의 절반쯤만 백성에게 할애했더라면, 오늘날 황후의 왕조는 무사했을 것이다.”
1920년 2월 17일 일기에서 그는 일제치하에 대해서도 그다운 설명을 더한다. “일본인이 조선에 손을 뗀다고 가정해보자. 조선은 러시아, 터키, 멕시코, 중국 등의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외국인의 통치를 증오하는 게 곧 미덕은 아니다. 인간은 하등동물과 마찬가지로 이런 본능을 가지고 있다.” 일제치하를 정당화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이지만 윤치호는 추가적인 설명을 더한다. “개인 간, 국가 간의 상호 의존성을 깨닫지 못하고, 전체의 행복보단 개인적인 이해관계를 더 중시하는 개인이나 국가는 진정한 독립을 이룰 수 없다.”
조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언짢은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지만, 1920년 3월 10일 윤치호의 일기에는 용산 개발에 관한 내용이 나온다. 조선 치하에서 용산은 무덤으로 뒤덮인 형편 없는 황무지에 지나지 않았다. 무덤 주인으로부터 소유권을 가져간 일본인은 이론적으로 옳은 일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본인이 섬뜩하기만 했던 지역을 아름다운 읍내로 변모시킨 건 엄연한 현실이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건 이론이 아니라 현실이다. 우리 조선인이 이런 진리를 좀 더 빨리 깨달을수록 더 현명해질 것이다.”
1920년 4월 17일 일기에는 오늘의 반일(反日)을 연상시키는 장면을 만날 수 있다. “요즈음 반일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인을 증오하는 것 자체가 곧 미덕은 아니다. 개나 닭이라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아마도 이런 주장만으로 윤치호를 평가하면 그가 지나치게 친일적인 인물이라고 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 세계에는 조선인이 더 분발해야 한다는 당부가 이렇게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그들을 증오하기 전에 우리의 지적·경제적 수준을 적어도 그들 수준만큼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우리가 성냥갑이나 인형 같은 별것 아닌 물건을 사러 일본인 상점으로 달려가는 한, 증오는 우리에게 득이 되기보다는 실이 될 것이다.”
일찍이 윤치호가 말했듯이 조선인들만큼은 아닐지라도 반일에 관한 한 한국인들도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행동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한일 간 경제전쟁에 관해서도 찬찬히 옳고 그름을 따지는 분위기가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1965년 대일청구권 자금은 한국 측이 수령함으로써 한일 양국은 물론이고 국민들 사이에 모든 권리와 의무관계가 청산되었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 대한 오해 때문에 앞으로 한국이 치러야 할 비용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공병호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