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YT는 그의 아들이 이날 “자신의 아버지인 이오 밍 페이가 숨을 거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최후의 모더니즘 건축가’로 불린 페이는 루브르 박물관과 함께 미국 워싱턴 국립미술관(내셔널 갤러리) 동관, 홍콩 중국은행 타워,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 등 세계 각지의 랜드마크 설계자로 명성을 떨쳤다.
그는 자신이 설계한 박물관, 호텔, 학교 등에서 ‘빛에 대한 경외’를 바탕으로 정밀한 기하학적 구조와 추상미를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페이는 1917년 4월 중국 광저우에서 유명 은행가와 플루트 연주자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모친 사망 후 이사한 상하이에서 1930년대 빌딩 붐을 목격하고 건축가의 꿈을 키웠다.
1935년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오른 페이는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학사 학위를, 하버드대 디자인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고 이후 미국에 정착했다.
1948년 뉴욕의 유명 부동산 개발업자 윌리엄 제켄도프의 회사에 취직해 실무 경험을 쌓은 페이는 1955년 뉴욕에 자신의 회사를 차렸다.
무명 건축가였던 그는 1964년 쟁쟁한 경쟁자를 물리치고 보스턴 존 F. 케네디 기념도서관 설계를 수주했다. 이어 1968∼1978년 워싱턴 국립미술관 동관 건축을 지휘했다.
워싱턴 국립미술관을 보고 감명을 받은 프랑수아 미테랑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1983년 페이에게 루브르 박물관 리노베이션을 맡겼다.
지금 루브르의 상징이 된 21m 높이의 거대 유리 피라미드를 두고 당시 프랑스 르몽드는 ‘디즈니랜드 별관’이라고 혹평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페이는 “동시대 건축가들은 현대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오래가는 건축은 뿌리가 있어야 한다. 전통과 조화르 이루기 위해 애썼다”고 설명했다.
이후 고국으로 눈을 돌린 페이는 중국 베이징 프래그런트 힐 호텔(1979~1982년)과 홍콩의 중국은행 타워(1982~1989년) 건축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페이는 1990년 공식적으로 은퇴했으나 이후에도 혼자 설계 작업을 하거나 회사에 자문을 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공식 은퇴 후 설계한 일본 시가현 미호박물관(1997년 개관)과 카타르 도하 이슬람예술박물관(2008년 개관)도 그의 걸작으로 꼽힌다.
페이의 수상 경력도 화려했다. 1979년 미 건축가협회(AIA) 금메달, 1988년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 대통령으로부터 국가예술훈장, 1983년 건축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 1992년 조지 H.W. 부시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대통령 자유의 메달을 각각 받았다.
생전에 그는 대한제국 황실과도 인연을 맺었다.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의 아들 이구는 1953년 미국으로 유학을 가 MIT에서 건축학을 전공한 후 이오 밍 페이의 회사에 취직했다. 이구는 이곳에서 독일계 미국인인 줄리아 리를 만나 결혼했다.
페이는 2014년 먼저 세상을 떠난 아내와의 사이에서 4명의 자녀를 낳았고, 이 중 2명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건축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