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자본론’의 저자 토마스 피케티는 “부의 분배 역사는 언제나 정치적이었으며 경제적 메커니즘으로만 환원될 수는 없다”고 말했다. 필자 역시 ‘최소 투입, 최대 산출’이라는 경제적 합리성만이 가늠자라면 분배와 성장 사이에서 고민하지 않는다. 분배는 경제적 합리성과 거리가 너무 멀다. 자본주의는 분배가 아닌 성장이 우선인 시스템이다. 한때 유행했던 ‘부자 되세요’ 광고처럼, 우리는 (부의) 성장이라는 프레임에 갇혀 살아왔다.
분배는 민주주의에 기반하고, 성장은 자본주의에서 출발한다. 다수의 지배가 민주주의라면 소수의 독점이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물론 근대 민주주의의 토양은 자본주의 발전의 결과이지만, 자본 축적이 진행되면 될수록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가치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제임스 뷰케넌의 지적대로 사업가가 이기적인 만큼, 민주주의의 대변자를 자처하는 정치인도 정치적 사업가에 불과하다. 표를 위한 구애는 조직화된 이익집단들의 목소리를 더 커지게 한다. 민주주의가 각기 다른 이익집단들의 세력화를 가져오고, 이로 인해 불평등의 완화도 속도가 나지 않고, 자본주의의 성장은 정체된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조화가 아닌 갈등으로 나아갈 때 그러하다.
갈등은 조화의 대칭어다. 조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갈등은 피하려 하지만 현실은 늘 그 반대로 나타난다. 조화로운 상황은 쉽게 깨지고, 갈등은 증폭되기 때문이다. 한국 경제는 수출-부채 주도 성장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내수-소득 주도 성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불평등과 저성장이 공존하는 현재 한국 경제의 상황을 고려한 당연한 선택인 것이다. 하지만 부채든, 소득이든 성장을 배제한 개념은 어디에도 없다.
성장은 낡은 시대의 사고라는 식의 분배 우선론을 잠시 접어두자. 성장이 멈추고 경제난이 심화하면, 해고를 당해도 못사는 사람부터 당하고, 사업이 망해도 영세업체부터 망한다. 성장을 끌어안지 않은 분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저성장의 시대이니, 이제 ‘성장이 아닌 분배가 우선이다’라는 편견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장정책이 먼저 자리를 잡아야 분배 정책을 밀어붙일 수 있다. 그나마 이제라도 정책당국이 ‘소득주도 성장론’에서 ‘성장’을 고민하기 시작한 것이 다행이다.
두 가지 길이 보인다. 먼저 인프라 투자이다. 대규모 토목 SOC와 대비되는 생활형 SOC 예산 확대는 이미 정부 정책으로 제시됐다. 이외에도 북한과의 이후 관계 개선을 고려한 남한 내 교통 인프라 투자, 도시재생뉴딜, 나아가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투자가 구체화할 수 있다. 더 큰 기대는 성장 자체를 자극하는 변화다. 바로 J노믹스의 다른 축인 혁신 경제이다. 8대 혁신성장 선도 산업을 육성하겠다는 어젠다에 비해 아직 성과는 초라하다. 하지만 소득주도성장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는 만큼 혁신성장의 중요성은 커지고 있다.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미국의 50%에 불과하다. 수확 체감의 세계에서 노동자 1인당 생산량 증대는 유지될 수 없다. 논리적으로 미국의 성장률 유지는 높은 생산성을 가능케 한 기술혁신, 더 나아가 수확 체감의 세계에서 벗어난 플랫폼 경제의 안착에 있다. 여기에 한국 경제의 고민을 해결해 줄 단서가 있다.
먼저 규제부터 단순화하고 완화해야 한다. 현행 포지티브 규제체계를 네거티브 규제체계로 전환해야 한다. 민간자금의 벤처 투자가 활발해지고, 비상장기업에 자금이 유입되려면 무엇보다 증시 자체가 살아나야 한다. 돈이 유입돼야 혁신을 하든, 투기를 하든 위험을 선택한다. 문제가 아닌 것을 문제 삼지 않으면, 자본시장은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그래야 부동산에 머물러 있는 유동성이 혁신경제를 위한 자금 조달을 향하게 된다. 정부는 이미 그러한 변화를 선택했다.
분배만이 아닌 성장도 중요하다는 인식 변화만으로도, 가을 증시가 기대된다. 여전히 분배정책에 노출된 내수보다는 대외 경기에 종속된 수출주를 선호한다. 성장 없는 경제에서 성장을 보이는 기업들에 투자자들의 관심은 몰릴 수밖에 없다. 2차 전지, MLCC, 자율주행 등 성장이 드러난 산업이 눈에 띈다. 주가는 이를 반영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