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르 몰려다니진 않지만 한 달에 한 번 만나는 ‘아줌마’ 모임이 있다. 함께 운동하는 이들과 점심을 먹는 자리인데, 매달 새로운 주제로 수다를 떨고 있다. 필자를 ‘형님’이라 부르는 이도 있다.
이달의 주제는 ‘휴가’. 아줌마 여섯 명이 이야기를 나누며 타박타박 한여름 속으로 들어갔다. 충남 당진이 고향인 K네 집 마당 평상에 누워 별을 세기도 하고, 지리산 자락의 작은 마을이 친정인 J네 동네 둘레길을 걷다 계곡에서 물놀이도 했다.
그러다 L의 깊은 한숨에 현실로 돌아왔다. 올여름 휴가는 시집 가족과 함께 떠날 예정이라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비용 문제도 아니고, 휴가지에서의 음식 장만 등 일 때문은 더더욱 아니라고 했다. 그를 힘들게 하는 건 도련님(결혼하지 않은 시동생), 아가씨(손아래 시누이), 서방님(결혼한 시동생, 손아래 시누이의 남편), 아주버님(남편의 형, 손위 시누이의 남편) 등 호칭 문제였다.
“시집 식구들이 상전도 아니고, 꼭 종이 된 느낌이라니까요.” L의 한마디에 호칭에 대한 불만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남편은 친정 가족과 모이면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언니와 오빠한테 처형, 처남이라고 부르는데, 아랫사람 대하는 듯해 기분이 참 더러워요.” “어디 그뿐인가요. 우린 시부모님 사는 곳을 시댁이라 하는데, 처댁이라 부르는 남자는 없잖아요. 처가라는 말도 몹시 불쾌해요.”
성차별적 호칭을 개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어디 이 모임뿐이랴. 청와대 국민청원에도 “가족 내 불평등 호칭을 개선해 달라”는 글이 올해 들어서만 십여 건이 등록됐다고 한다.
최근엔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이 시민들의 의견을 바탕으로 전문가 자문회의를 거쳐 선정한 ‘성평등 언어사전’을 발표했는데,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문제가 심각하다. “나는 ‘여’ 씨가 아니므로 직업 앞에 붙이는 ‘여(女)’ 자를 빼야 한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다. 여검사, 여교수, 여의사, 여기자, 여군, 여경 등 직업을 가진 여성이 마치 ‘여’ 씨이듯 꼬박꼬박 붙이는 ‘여’ 자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총각은 처녀작을 못 만드나요” “아빠는 유모차를 끌 수 없나요” “결혼을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겁니다” 등의 의견에는 무릎을 탁 쳤다. ‘처음 하는 일이나 행동’이라는 뜻에서 ‘처녀’를 붙인 ‘처녀작’, ‘처녀출전’ 등의 단어도 각각 ‘첫 작품’과 ‘첫 출전’으로 바꿔 써야 한다. 총각작·총각출전은 없지 않은가. 또 엄마만 끌어야 할 것 같은 ‘유모차’는 ‘유아차’가, ‘미혼’은 ‘비혼’이 바른 표현이다.
이 밖에 ‘그녀’를 ‘그’로, ‘저출산’을 ‘저출생’으로, ‘자궁(子宮)’을 ‘포궁(胞宮)’으로,‘몰래카메라’를 범죄임이 명확한 ‘불법촬영’으로,‘리벤지 포르노(revenge porno)’를 ‘디지털 성범죄’로 바꿔 말해야 한다는 의견에도 격하게 공감한다.
성평등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언어의 격부터 높여야 한다. 말이 생각을 바꾸고, 생각이 행동을 바로잡는다. 여성을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저급한 언어를 쓰는 이가 있다면 조심하시라. 아줌마들이 한순간에 조폭으로 돌변해 손봐 줄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