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도자미술관, 한국 도자기에 관심 있는 이라면 꼭 한 번은 가봐야 하는 성지와 같은 곳. 해외에서 이처럼 우리 도자문화유산을, 그것도 빼어난 명품을 다량 소장하고 있는 곳은 없다. 국립박물관에도 없는 명품이 수두룩하고,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청화백자전’을 개최할 때도 여러 점을 빌려왔을 정도다.
동양도자미술관의 역사는 195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다카산업 회장 아다카 에이치(安宅英一, 1901~1994)는 뛰어난 미의식을 발휘해 1951년부터 한국 도자기를 열정적으로 수집했다. 당시 한국은 6·25로 쑥대밭이 되어 있었고, 먹고살기에 바빴던 그 시절 우리 문화유산은 속절없이 국외로 반출되고 있었다.
반면 일본은 한국전쟁 특수로 태평양전쟁 패전의 피폐함에서 부흥하는 경제 호황을 누릴 때였다. 아다카는 그런 여건에 힘입어 회사 자본금을 늘려가면서까지 우리 도자기를 집중적으로 사들였고, 그의 컬렉션은 단기간에 일본 최고의 한국 도자 컬렉션으로 주목받게 된다.
그러나 시운은 어쩔 수 없었던지, 1977년 회사가 석유파동에 따른 불황을 이기지 못하고 파산하면서 아다카 컬렉션은 위기에 봉착한다. 하지만 그의 컬렉션이 해체되거나 국외로 유출될 것을 우려한 일본 국회의 보존결의가 있은 후, 주거래은행이던 스미토모(住友)은행이 일괄 구입해 오사카시에 기증하고, 이를 보관 전시하는 공간으로 미술관이 세워지게 된다. 당시 965점의 컬렉션 중 한국 도자가 793점이었다. 신라 토기가 몇 점 포함되었지만 고려청자, 조선백자, 분청(粉靑)이 중심이고 하나같이 아름다운 명품들이었다.
동양도자미술관은 또 한 사람의 걸출한 컬렉터와의 인연으로 컬렉션을 크게 확장하는 행운을 맞게 된다. 재일 한국인 이병창(李秉昌, 1915~2005) 박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우리 사회에서 이병창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전북 익산 출신에 이승만 정부 시절인 1949년 초대 오사카 영사를 지낸 사람으로 도쿄(東京)에서 목재무역업으로 입신했다. 한국 역사와 고미술에 깊은 애정을 지녀 한국 미술품, 특히 우리 옛 도자기를 많이 수집했으며 일본 재계에 폭넓은 인간관계를 지녔던 사업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 그가 1996∼98년 세 차례에 걸쳐, 중국 도자기 50점을 포함해서 301점의 한국 도자기를 동양도자미술관에 기증한 데 이어 도쿄의 집과 부동산까지 연구기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가 기증한 수집품의 당시 평가액은 45억 엔, 부동산을 합치면 47.3억 엔에 이르렀다.
그가 한국이 아닌 일본에 수집품을 기증한 것을 두고 국내 언론이 호들갑을 떨었지만, 일부 뜻있는 사람들은 두고두고 아쉬워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많지만 여기서 다 언급할 수는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당시 열악한 문화예술 인프라도 한몫했겠지만, 민족문화의 가치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지도층이 더 큰 몫을 했다는 점이다.
이병창은 수집품의 안식처로 오사카를 택하면서 재일동포들과 그 미래 세대가 조국의 풍요로운 역사와 문화를 자랑으로 여기고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기를 염원했다. 그 뜻을 계승하는 일은 오롯이 후인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사족으로 덧붙이면, 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 일부가 여러 차례 미국의 메트로폴리탄박물관 등 세계 유명 미술관에서 특별전시와 상설전시를 통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게 되는데, 거기에 전시된 작품들은 전부 한국 도자기였다. 한국 도자기에 대한 국제사회의 높은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아다카, 이병창 컬렉션이 질적으로 뛰어나다는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