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현금 사회…가상화폐 대국 꿈꾸는 일본

입력 2017-11-23 13:18 수정 2017-11-23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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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금 없이 사는 18전 16승(9KO) 기록의 일본 프로복서 스기타 유지로는 전 자산의 90% 이상을 비트코인으로 보유하고 있다. 통장에 있는 현금은 3개월치 생활비 몇 만 엔이 전부다. 언제까지 링에 오를 수 있을지 불투명한데다 부상도 잦아 수입이 불안정하다고 판단한 스기타는 2010년부터 매월 달러에 투자하면서 자산운용에 눈을 떴다. 비트코인을 알게 된 건 2013년 4월경. 당시 비트코인 가격은 1BTC당 1만 엔 정도였다. 그러다가 그 해 말 비트코인이 12만 엔 대까지 오르는 걸 보고 그는 ‘통화의 역사를 바꿀 존재다’싶어 돈이 생길 때마다 비트코인을 사 모았다.

#중국 남부 광둥성 선전 시 뤄후 구의 간선도로 보도교. 손이 부자유스러운 한 남성이 바닥에 엎드려 안경 다리에 붓을 매달아 몸을 움직여 붓글씨를 쓴다. 행인의 눈길을 끄는 건 남성의 앞에 놓인 QR코드다. 스마트폰 앱을 사용해 이 QR코드를 읽어들인 뒤 금액을 입력하면 바로 이 거지의 계좌로 돈이 입금된다. 중국에서는 이런 광경이 드문 일이 아니다. 이는 중국 IT 대기업 알리바바그룹 산하 금융회사 앤트파이낸셜의 전자결제서비스 알리페이와 텐센트의 위챗페이를 이용한 것이다. 중국은 최근 몇 년 동안 알리페이와 위챗페이를 이용한 모바일 결제가 급속히 확대했다. 중국 인민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6년 모바일 거래 횟수는 약 257억 회로 전년 대비 약 86% 증가했고, 결제 금액은 약 157조 위안(약 2경5868조 원)이었다. 알리페이나 위챗페이만 있으면 중국의 도시에서는 지갑이 없어도 생활이 지장이 없을 정도다.

조개에서 시작된 화폐 경제가 대전환점을 맞고 있다. 가상화폐와 전자결제의 등장으로 지폐나 동전 같은 화폐가 사라지는 ‘현금 종말 시대’가 현실화하고 있다. 상점에서의 물품 대금 결제나 레스토랑에서의 식대 결제는 물론 거지 동냥질, 종교단체 헌금도 가상화폐나 전자결제가 대신한다. 일본 경제주간지 닛케이비즈니스(NB)는 최신호 특집에서 현금의 종말은 인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놓을 것이라며 이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모색하며 ‘가상화폐 대국’을 자처하는 일본의 움직임을 다각도로 조명했다.

NB에 따르면 일본은 세계 비트코인 거래의 약 60%를 차지하며 명실공히 가상화폐 대국에 올라섰다. 소매·금융·제조 등 업종을 불문하고 전 사회가 ‘포스트 현금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실제로 일부 주택 상가 리모델링업체는 공사대금을 가상화폐로 받고, 도쿄 번화가의 회전초밥집에서는 QR코드나 가상화폐로 결제가 가능하다. 대형 가전할인점들도 현금이나 신용카드 대신 가상화폐를 받는 등 현재 일본에서 가상화폐로 결제가 가능한 상점 수는 1만 개에 이른다.

그 동안 일본에서 가상화폐 결제는 외국인 관광객이나 일부 마니아만 이용했다. 그러나 그 저변이 확대하면서 일반인으로까지 이용이 확대하고 있다고 NB는 전했다. 현금이 독점해온 영역을 가상화폐가 침범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 상점은 대놓고 현금을 거절한다. 이런 상점에선 신용카드 외에 동일본여객철도의 SUICA와 세븐앤아이홀딩스의 NANACO 같은 전자화폐로 결제해야 한다.

기존 은행들은 초조하다. 가상화폐 사용이나 전자결제 서비스가 늘고 현금 사용이 줄면서 입지가 좁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세븐은행의 경우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 기능을 강화했다. ATM으로 해외 송금이나 즉석 대출이 가능하게 하는 식이다. 대형은행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은 가상화폐 등 디지털 관련 사업을 전담하는 새 회사를 만들기로 했다. 현금을 토대로 한 전통 비즈니스 모델이 무의미해지면서 이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작용한 것이다.

기업들도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동참하고 있다. 올초 출범한 글로벌 동맹 ‘엔터프라이즈 이더리움 얼라이언스(EEA)’에 도요타자동차 등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대거 참여했다. NB는 가상화폐나 블록체인 기술은 인공지능(AI)과 빅데이터처럼 차세대 핀테크에 필수적인 기술이라며 포스트 현금 시대를 맞아 개인에서 대기업까지 움직이기 시작한 일대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포스트 현금 사회’는 기업들의 자금 조달 통로도 바꿔놨다. 그동안은 벤처캐피털(VC)이나 은행 등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지만 가상화폐공개(ICO)라는 새로운 자금 조달처가 생겨나면서 기업들의 선택지가 넓어진 것이다. 일본 파일코인은 ICO를 통해 292억 엔(약 2853억 원)을 조달했고, 테조스는 264억 엔을, 파라곤은 208억 엔의 자금을 조달하는 등 외국에서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100억 엔 규모 이상의 ICO가 속출하고 있다.

‘화폐의 종말’의 저자인 세계적인 경제학자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NB 기고에서 “일본은 미국이나 중국에 비해 가상화폐에 관용적인 나라”라며 “가상화폐 거래가 활성화하면 기술 개발도 수반돼 가상화폐 선진국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일본의 통화 유통량이 20%도 안된다는 점에 주목, “장롱예금이 많아 자칫하면 룩셈부르크처럼 지하경제와 탈세의 온상이 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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