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평대군 부인 신씨(廣平大君 夫人 申氏)는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신자수(申自守)의 딸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1436년(세종 18) 세종과 소헌왕후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李璵)와 혼인하였고, 1444년 영순군을 낳았다. 하지만 그해 광평대군이 창진(瘡疹)으로 사망하자, 신씨는 곧바로 비구니가 되었다. 법명은 혜원(慧園)이었다.
비구니가 된 후에도 신씨는 특정 사찰로 들어가는 대신 광평대군방에서 기거했는데, 인근에 있던 군장사를 다니며 불공을 올렸다. 또한 광평대군묘 부근에 있던 견성암을 크게 중창했다. 신씨는 광평대군방에 속한 재산의 절반에 달하는 70여 결의 토지와 1000여 구(區)를 보시해 작은 암자를 대규모 사찰로 중건하였다.
성종실록에는 “광평대군의 부인이 큰 절을 (남편의) 묘소에 세웠는데, 높은 집과 아로새긴 담에 금벽(金碧)이 빛나고 재(齋)를 닦고 경(經)을 읽기를 사시(四時)에 그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이때부터 견성암은 견성사라 칭해졌다. 신씨의 대규모 불사는 조정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조정 신료들은 신씨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성종은 묵살했다.
신씨가 견성암에 막대한 재산을 희사한 것은 승려들이 경제적인 어려움 없이 수행에 전념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함이었다. 김수온의 ‘견성암법회기’에는 “광평대군 부인이 재산을 출연하여 1000여 명의 승려들이 밤에는 참선을 하고 낮에는 경전 독송을 하였으니, 광평대군 영가(靈駕)가 극락정토에서 왕생하기를 발원하기 위함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처럼 광평대군 부인의 보시로 조성된 견성사는 화려한 건물을 갖추고 승려들이 아무 걱정 없이 공부에 전념하는 사찰로 유지되었다.
그 후 성종의 능 선릉(宣陵)이 광평대군 묘역에 들어서게 되면서 광평대군의 묘는 무안대군의 묘 근처로 이장되었다. 견성사도 능역 밖으로 옮겨져야 했지만, 정현왕후는 견성사를 선릉의 능침사로 삼은 후 계속 유지되도록 하였다. 하지만 관료들이 끊임없이 절을 철폐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1498년(연산군 3)에 절을 능역 밖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능역 밖으로 옮기면서 절 이름이 봉은사로 개칭되었다.
신씨의 외동아들인 영순군이 20대 중반에 요절하자, 영순군 부인 최씨도 ‘선유(善柔)’라는 법명의 비구니가 되었다. 이들 고부는 영순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수륙무차평등재의촬요’(보물 제1105호)를 간행해 전국 사찰에 유포했다. 책의 말미에 실린 발문에는 “영가부부인과 영순군부인이 상사(喪事)를 당하고서 정성과 신심을 다했다”고 기록돼 있다.
신씨는 재산의 절반을 절에 시주할 정도로 평생토록 불사와 신행에 열중하였는데, 이는 유학자 관료들로부터 끊임없이 지탄을 받았다. 하지만 이에 아랑곳없이 평생토록 불교계의 대화주(大化主)를 자처했고,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보시와 회향(廻向)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