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공연의 힘

입력 2017-06-09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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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뮤지컬협회 부이사장

올해 초 문화체육관광부는 2017년 문화콘텐츠산업 10대 트렌드를 발표하면서 ‘상실의 시대, 판타지 멜로와 정치물에서 위안받다’라는 화두를 던졌다. 2017년의 한국인들은 현실을 외면하며 초월적인 판타지 멜로에 빠지거나 현실을 직시하며 정치물에 관심을 가지리라 전망한 것이다. 그리고 적중하는 중이다.

공연 분야도 다르지 않다. 유난히 역사적인 인물이 우리 시대의 동반자로 부활한다. 특히 윤동주, 백석, 이상 등 시인들의 시가 공연 무대에서 입체적으로 각인되고 있다. 이는 시각적이고 감각적이고 즉물적인 경향이 강한 젊은 관객들을 울린다. 혼돈된 정치 상황의 희생양이었던 그들, 시를 쓰면서 그 시대를 외면하거나 저항하거나 초월했던 그들을 표류하는 이 시대에 불러내 자기 동일시의 판타지를 무의식적으로 경험하게 만들기 때문이지 싶다.

최근에 굴곡진 한국 근대사 속 두 인물을 공연에서 만났다. 뮤지컬 ‘스모크’는 시인 이상의 분열된 자아를 통해 시대를 앞서간 천재 시인의 내면을 공감하게 해주었고, 연극 ‘불량청년’은 독립 열사 김상옥을 통해 잊고 지내는지도 모를 자신 안의 초인(超人)을 만나게 해줬다.

관객들이 공연장을 찾는 이유 중 하나는 마치 여행하듯 판타지 세계에서 현실을 잊을 수 있어서일 것이다. 또는 현실 너머의 세계를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스모크’의 추정화 연출은 시인 이상의 내면적 고뇌에 집중했다. ‘스모크’에는 이상의 내면이 분리된 인물 셋이 등장한다. 난해한 시로 인해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하며 죽음으로 그 세상을 떠나려는 ‘초(超)’, 그럼에도 시 창작에 대한 순수한 열정이 솟구치는 ‘해(海)’, 그 분열된 자아 사이에서 삶을 각성시키는 ‘홍(紅)’이 그들이다.

그들은 거침없이 외친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같은 시대를 살아도 저들의 시대와 내 시대는 한참 떨어져 있다”,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실체가 없어. 그저 연기야”라고. 관객들은 그 세 인물에게서 ‘이상’을 재발견하고 스스로를 재발견한다.

‘불량청년’의 이해성 연출은 일제강점기의 의열단을 통해 오늘의 ‘N포 세대’ 청년 속에 잠재된 초인을 만나게 한다. 청년 실업자 김상복은 유치원을 나온 이후 줄곧 바빠도 여전히 학자금 대출 이자와 월세에 허덕이며 아르바이트로 연명하는데, 어느 날 광화문 집회 현장에서 독립 열사 김상옥의 동상(銅像) 역할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물대포를 맞는다. 그런데 엉뚱하게 김상옥 열사와 의열단 청년들의 독립 투쟁 현장으로 시간 여행을 하게 된다. 그리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 김상옥과 의열단의 신념, 희생을 향해 “위선”이라고 외치며 “목숨을 보전하라”고 말려 댄다.

고달픈 실업자 인생이라도 어떻게든 사는 것이 중요하다는 김상복의 모습을 지켜보면 결국 김상옥이나 김상복이나 주어진 현실에 맞서 투쟁하는 한 가지 모습이구나 싶다. 일본 경찰의 총탄에 죽어가는 김상옥을 향해 김상복이 이육사의 시 ‘광야에서’를 들려주는 마지막 장면에서 관객들은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누구나 본질 깊숙이 초인을 품고 태어난 것이리라.

뮤지컬 ‘스모크’와 연극 ‘불량청년’이 주목받는 점은 추정화 연출과 이해성 연출이 역사적인 인물을 치밀하고 집요한 진정성과 남다른 시각으로 재탄생시켰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의 관객들을 시간 여행에 몰입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실존 인물을 판타지로 되살려 공감하게 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연출의 면에서도 두 창작자의 내공이 헤아려진다.

추정화와 이해성 두 연출가는 어두운 시대에 떠밀려 요절한 두 실존 인물의 비극을 뒤집었다. “한 번만 더 날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라고 마지막 대사를 외치며 비상과 초월의 에너지를 내뿜는다. 관객들은 눈시울을 적시고 ‘이상’과 ‘김상옥’을 실체화하며 스스로의 삶을 추스른다. 두 연출가는 그것이 공연이 지닌 판타지의 힘임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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