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국적 기업의 L 사장 역시 그랬다. 그는 사장에 임명되고 나서 자신의 멘토인 L 교수를 찾아갔다. 그때 멘토가 들려준 첫마디는 “정치력을 키우라”였다. 정치력? 의외의 조언이었다. 우리는 정치력 하면 흔히 음험한 권모술수와 테이블 밑에서 거래를 일삼는 저열한 한 수를 먼저 떠올리니 말이다. 정치라는 말을 듣고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 그의 거부감에 멘토는 한마디로 정치는 처세력(處世力)이 아니라 치세력(治世力)이라고 잘라 말해 주었다. “정치력, 갈등조정 능력, 미묘한 이해관계를 읽고 조정하는 것이 리더의 제1 책무”라고 설명하더라는 것이다. 난제를 해결하고 갈등을 조정하며 이를 통해 추진력을 확보하는 일은 정치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굽은 것을 펴고 잘못을 바로잡는 힘은 결국 정치에서 나온다.
미국의 정치학자인 데이비드 이스턴은 “정치란 가치의 권위적 배분”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돈과 자리를 나누고, 가치를 세우는 데 정치력은 필수다. 같은 칼이라도 누구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이기(利器)로 쓰고, 누구는 사람을 해롭게 하는 흉기(凶器)로 쓴다. 정치력이 음험한 것이 아니라, 음험하게 쓰일 때 문제가 된다.
정치는 어두운 의미에서나 올바른 의미에서나 이면, 즉 보이지 않는 곳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통한다. 말과 관계의 이면에 흐르는 사람들의 감정과 이해득실과 요구와 니즈의 맥을 짚어 대응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리더가 야심찬 목표를 세우는 것과 개혁의 기치를 높이 드는 것 못지않게 둘러보아야 할 것은, 현장과 호흡하고 그 미묘한 맥들의 이해관계를 읽고 조정하는 것이다.
팔목을 잡고 있지만 뒤로는 발목을 잡고 있는 사람은 아닌지, 발목을 잡고 있는 적군으로 봤는데 사실은 팔목을 함께 잡을 아군이 아닌지… 우선적으로 파악해야 할 것이 주요 이해관계자의 기대 사항이다. 정치력은 인간의 욕망을 불온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읽어내는 데 있다. 이때 공식적인 관계자뿐 아니라 드러나지 않게 큰 영향을 미치는 비공식적 이해관계자들의 영향력을 조기에 파악하는 것도 중요하다. 핵심적 이해관계자와 기대하는 수준, 기대하는 사항이 다를 때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것을 조정하지 않고 단지 개혁의 기치가 옳다는 것만으로 밀고나가서는 순식간에 독불장군, 패장(敗將)으로 고꾸라지기 쉽다.
하늘을 우러러, 땅을 내려다보며 한 점 부끄럼 없다는 올곧은 대쪽파일수록 정치력을 폄하하곤 한다. “나는 회사에 정치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일을 하러 온 것”이라고 자기주장을 밀어붙인다. 하지만 정치란 자신의 정체성을 부각하고 특별한 관계를 만들고 유지하기 위한 전략적 행위로, 리더십의 필수요건이다. 주요 이해관계자들의 니즈를 파악하고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은 권모술수가 아니라 리더십의 필수과정이다.
정치를 우습게 내리깔아 보는 당신, 혹시 홀로 개혁의 파수꾼을 자처하며 고독을 씹고 있지는 않는가. 산이 깊으면 골도 깊다. 조직이란 산골짜기는 산만 있는 법도, 골만 있는 법도 없다. 명과 암, 일과 관계 모두를 잘 알아야 한다. 올바른 정치력은 비루한 처세술이 아니라 조직을 살리고자 하는 절박함의 치세술이다. 요즘 정치인들의 행각을 보면 치세술은커녕 처세술도 제대로 못 익힌 것 같아 안타깝다. 정치력의 명예회복을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