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영은 1914년 평안북도 운산에서 태어났다. 1931년 평양의 정의고등보통학교, 1936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를 졸업했다. 1949년 여성 최초로 서울대 법대를 나온 이태영은 1952년 고등고시에 합격해 최초의 여성 변호사가 되었다.
이태영이 변호사가 될 무렵, 새로운 가족법(민법의 친족·상속편)을 제정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광복 후 미군정은 창씨제도를 비롯해 일제의 악법을 폐지했지만, 민법은 새로운 법을 제정할 때까지 법적 효력을 유지시켰다. 이에 새로운 민법이 시행된 1960년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일제의 구민법을 사용하고 있었다.
형법이 1953년 9월 제정되어 10월 3일부터 시행된 것과 달리, 가족법은 1948년부터 10년 가까이 논란이 계속되어 1958년 2월에야 공포되었고 1960년 1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관습’을 중시하는 입장과 ‘평등과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세력 간의 대립이 심했기 때문이다. 후자를 대표해 가장 정력적으로 활동했던 전문가가 바로 이태영이다.
이태영은 변호사가 된 직후부터 남녀평등 실현과 가족제도의 민주적 개혁을 통해 열악한 여성의 법적 위치와 조건을 개선하고자 노력했다. 가족법의 권위자인 서울대 법대 정광현 교수를 찾아가 자문하고, 여성단체의 의견을 들어 보수적인 정부 초안에 수정안을 만들었다. 이때 정부안을 만들었던 대법원장 김병로가 ‘법조계 초년생’ 이태영에게 “버릇이 없다”고 호통을 친 일화는 유명하다. 이태영은 이에 굴하지 않고 민주당 국회의원이던 남편 정일형의 도움을 받아 국회에 수정안을 제출했다.
결국 부계혈연을 중시하는 불평등한 가족법이 제정되었지만, 기혼 여성이 법적으로 무능력자였던 조항이 폐지되고 호주의 권한이 크게 약화되는 등 성과도 없지 않았다.
1956년 이태영은 여성문제연구원 부설 여성법률상담소(현 한국가정법률상담소)를 설립해 법률지식이 부족해 불리한 처지에 놓인 수많은 여성들을 도왔다. 또 1963년 가정법원을 설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 뒤 서울가정법원 조정위원, 세계여자변호사회 부회장, 국제법률가위원회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1969년에는 ‘한국 이혼제도 연구’로 서울대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1963년부터 1971년까지 이화여대 법대 교수를 역임했다.
이태영은 평생 호주제 폐지, 친권의 평등, 동성동본불혼제 폐지 등 가족법 개정운동을 위해 헌신했다. 여권운동뿐 아니라 정치 민주화에도 큰 역할을 했다. 1974년 11월 민주회복국민선언과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등에 참여했다. 이 공로로 1975년 막사이사이상, 1982년 유네스코 인권교육상, 1989년 브레넌 인권상 등을 수상했고, 199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 등을 받았다. 한국여성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이태영은 1998년에 눈을 감았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