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의 과학 에세이] 성장의 자각

입력 2017-03-23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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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대 석좌교수

영화 ‘레옹’에서 견습생 살인청부업자가 되려는 소녀 마틸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성장하기를 멈췄어요. 그저 나이만 먹어갈 뿐이죠(I finished growing up. I just get older.).” 이런 느낌은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대개는 일상의 반복에 눌려 지낼 때 그렇다.

열 번쯤 풀어본 수학 문제를 또 반복해서 풀어야 하고 게다가 이런 일이 끝도 없이 반복해 일어나면, 아이는 마틸다의 대사를 읊조릴 수밖에 없다. 이런 학창 시절의 잔혹사는 입시에서의 승리를 위해 일어난다. 그리고 아이에게서 성장의 자각을 앗아간다.

천재성 있는 아이에게는 정해진 교과과정에 연연하지 말고 새로운 배움과 발견의 즐거움을 주는 게 좋다. 하지만 대부분 아이에게 선행학습은 결국 반복 학습으로 이어져서 독이 된다. 아이는 새로운 만남의 느낌도 성장의 자각도 경험하지 못하고 조로(早老)한다. 뭔가를 좋아해볼 기회도 영영 날아간다. 매일 나이만 들어가는 마틸다가 되어 버린다.

매일 다른 세상과 만나는 느낌은 성장의 느낌과 흡사하다. 어릴 적 신나게 축구하는 애들이 유치해 보여서 동네 애들 집에 다니면서 눈에 띄는 책은 모조리 읽었다. 매스게임하듯이 똑같아지는 게 싫었던 걸까. “전집류는 읽지 마라”는 소리도 자주 듣지만, 충동구매한 친구 부모님들 덕에 많이 읽다 보니 지금도 전집 읽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이게 다 동나고 나서는 집 근처의 군립 도서관에 가서 주제, 분야와 상관없이 그냥 가나다순으로 모조리 읽었다. 매일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자각하던 시절이었다.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던 습관은 평생 이어졌다. 시기에 따라 다소의 쏠림은 있지만, 주제나 분야에 대한 편식 같은 게 딱히 없다. 눈앞에 보이는 건 다 읽는다. 내가 경험하는 극히 제한된 세계를 벗어나서 여러 세계를 만나는 방식이려니 여긴다.

잡독을 즐겨서인지 글의 내용이나 메시지뿐 아니라 읽는 맛을 중요시하게 됐다. 지나치게 선명하고 직접적인 메시지는 부담스럽다. 읽는 맛과 감칠맛에 메시지가 녹아 있어야 더 설득력 있다는 케케묵은 생각을 고수한다. 잡독, 다독을 하다 보니 어느새 속독하는 법도 터득하게 됐다. 한창때는 지금은 꿈도 못 꿀 속도로 읽었다. 남의 책을 빌려 읽다가 돌려줄 시간이 가까워지면 특히 그랬다. 잘 쓴 글과 조악한 글의 비교에도 조금은 눈뜨게 되고, 논리 비약과 구호로 가득한 글은 금방 가려낸다. 내 의견과 달라도 근거와 함께 논리정연하게 풀어나가는 글에는 후한 점수를 준다.

취미가 뭔지도 모르고 어정쩡하게 지내다 보니 일과 취미의 경계가 모호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던 차에, 새로운 IT 상품에 대한 글을 읽거나 신제품 전시장에 가서 무엇이 달라졌는지 직접 경험해볼 때 시간 가는 줄 모르며 행복해하는 나를 발견하게 됐다. 그래서 꼭 취미를 말해야 하는 상황이면 ‘얼리 어답팅(early adopting)’이라고 대답한다.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제품을 접하고 그 속에 녹아 있는 ‘이전에 없던 발상’을 만나면서 짜릿함을 느낀다. 얼리어답터는 혁신을 소비하고 지원한다고 거창하게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 기술 진보의 경향성에 조금 눈뜨기도 하는 건 부수적으로 얻는 수확이다. 특별한 취미가 없는 무색무취의 장년이라면 ‘아재 얼리 어답팅’의 세계를 경험해 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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