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약업계에서 오너 후계자들이 점차적으로 본격적인 경영 능력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장수기업이 많은 제약사 특성상 상당수 업체들은 핵심 사업부를 후계자에 넘기며 2·3세 경영체제가 본 궤도에 오르고 있다는 평가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제일약품은 이달부터 제일헬스사이언스를 출범했다. 단순 물적 분할 방식으로 설립된 제일헬스사이언스는 일반의약품 사업만을 전문으로 담당하는 법인이다.
주목할만한 점은 제일헬스사이언스의 초대 수장으로 오너 3세 한상철 부사장(40)이 맡았다는 것이다. 한 부사장은 제일약품 창업주인 고 한원석 회장의 손자이자 한승수 회장의 장남이다. 미국 로체스터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지난 2007년 제일약품에 입사했다. 한 부사장은 마케팅본부 상무, 경영기획실 전무 등을 역임하며 경영수업을 받았고 지난해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이번에 신설법인의 대표를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경영 전면에 나선 것이다. 기존에 취약한 일반의약품 사업을 육성하는 숙제를 안으며 경영 능력을 검증받는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지난해 제일약품의 일반의약품 매출은 349억원으로 회사 매출 5947억원의 5.9%에 불과하다. 파스류 '케펜텍'이 간판 제품으로 지난해 138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사실 한 부사장이 맡는 일반의약품 사업은 시장 규모도 크지 않을뿐더러 시장 침투도 쉽지만은 않은 영역이다.
국내 의약품 시장에서 일반의약품의 비중이 매년 축소되고 있다. 지난해 국내 의약품 생산실적(14조6220억원)에서 일반의약품이 차지하는 비중은 16.96%에 그친다. 2011년 18.38%에서 지속적으로 하락세다. 제일헬스사이언스의 시장 확장성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얘기다.
일반의약품 시장의 경쟁력은 제품력 이외에도 차별화된 영업력이 크게 좌우하는데 제일헬스사이언스의 영업인력은 30명 가량에 불과하다. 전담 유통조직 정비도 필수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완제의약품 유통 정보를 보면 지난해 제약사가 공급한 일반의약품 2조3227억원 중 도매상을 거치지 않고 직접 요양기관에 유통한 직거래 비중은 33.4%(7755억원)에 달한다. 전문의약품의 직거래 비중 10.3%를 크게 웃돈다.
일반의약품 사업에서 성과를 내려면 단순히 별도의 법인 구축 이외에도 갈 길이 멀다는 의미다. 제일약품 관계자는 “현재 법인 분리 이후 조직을 재정비하는 단계다. 향후 인력 충원 등을 검토 중이다”고 말했다.
제일약품 이외에도 핵심 사업부를 오너 2·3세에 맡기면서 경영 능력 검증과 경영 승계를 시도하는 업체가 늘고 있다.
일동제약은 지난 8월 지주회사체제로 전환하면서 본격적인 오너 3세 경영을 시작했다.
윤 사장은 일동제약 창업주의 손자이자 윤원영 회장의 장남인 3세 경영인이다. 윤 사장은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조지아주립대 대학원 졸업했고 KPMG 인터내셔널 등에서 회계사로 근무하다 2005년 일동제약 상무로 입사했다. 이후 PI팀장, 기획조정실장 등을 거쳐 지난 2011년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승진했고 2014년부터 옛 일동제약 대표이사 사장을 역임했다.
윤 사장은 기존에는 기존에는 이정치 회장(74)· 정연진 부회장(68)과 공동 대표체제를 구축했지만 분할 이후 처음으로 단독대표를 맡으며 ‘홀로서기 경영’에 나섰다. 이정치 회장과 정연진 부회장은 각각 일동홀딩스에서 대표이사 회장과 부회장을 맡는다.
일동제약은 지분 승계 작업도 사실상 마무리 단계다. 지난 3분기말 기준 지주회사 일동홀딩스의 최대주주 및 특수관계자의 지분율은 31.72%다. 윤원영 회장이 6.42%, 윤웅섭 사장이 1.67%의 지분을 각각 보유 중이고, 최대주주는 8.34%를 보유한 씨엠제이씨다.
씨엠제이씨는 윤원영 회장이 설립한 개인 회사다. 씨엠제이씨는 지난 2013년 당시 경영권을 위협했던 주요주주 안희태씨 등의 주식(6.98%)을 매입하면서 최대주주로 올라섰다.
하지만 지난해 윤 회장이 지난해 씨엠제이씨의 지분 90%를 윤 사장에 증여하면서 씨엠제이씨는 사실상 윤 사장의 소유 회사가 됐다. 윤 사장이 보유한 일동홀딩스 지분이 많지 않지만 씨엠제이씨의 지분을 합치면 최대주주가 된다
일동제약은 윤 사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면서 빠른 속도로 체질개선 작업을 진행 중이다. 기존에 녹십자, 개인투자자 등으로부터 지속적으로 경영권을 위협받는 상황에서도 연구개발(R&D) 역량 강화에 주력했다.
일동제약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4년간 단 한 건의 임상시험 계획을 승인받을 정도로 그동안 신약 개발에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2013년부터 지난해까지 3년간 무려 42건의 임상시험에 돌입했다.
현재 10여건의 복합 개량신약을 개발 중이며 LG생명과학으로부터 판권을 넘겨받은 B형간염신약 ‘베시포비어’도 자체개발 첫 신약 허가를 앞두고 있다. 일동제약이 지난해 투입한 R&D비용은 509억원으로 윤 사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기 직전인 2012년 311억원보다 63.7% 늘었다. 매출 대비 R&D 투자 비율은 처음으로 10%를 넘어섰다
허 사장은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한 이후 조순태 부회장과 함께 공동 대표 체제를 꾸렸지만 올해부터 단독 대표이사를 맡으며 R&D 부문을 비롯해 경영 전반을 총괄하고 있다. 올해부터는 한국제약협회 이사회에 직접 참여하며 녹십자의 간판 역할을 수행 중이다.
다만 허 사장이 보유한 녹십자홀딩스의 지분율은 2.42%에 불과해 후계구도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상태다. 녹십자홀딩스는 고 허영섭 회장의 동생 허일섭 회장(11.03%)과 허 회장의 일가 등이 지분을 나눠갖고 있다. 고 허 회장의 3남 허용준씨(2.50%)는 녹십자홀딩스에서 부사장을 맡고 있고 장남 허성수씨는 1.01%의 지분을 보유 중이지만 회사 경영에 관여하지 않는다.
1986년 JW중외제약에 입사한 이경하 회장은 지역 영업담당부터 마케팅·개발·연구 등 다양한 부서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JW중외제약이 일본 주가이제약과 공동투자해 설립한 C&C신약연구소를 총괄 지휘하기도 했다. C&C신약연구소는 최근에는 아토피치료제, 유방암치료제 등 혁신신약 후보물질 발굴에 성공하며 R&D 성과를 내고 있다. JW중외제약도 표적항암제 등 차세대 신약 개발에도 속도를 내며 미래 먹거리를 준비 중이다.
한미약품도 오너 자녀들이 경영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단계적으로 후계구도가 구축되는 분위기다.
한미약품의 지주회사 한미사이언스는 지난 3월 창업주 임성기 회장의 장남 임종윤 사장(44)의 첫 단독 대표이사 체제를 가동했다. 기존에는 임성기 회장과 임종윤 사장의 공동 대표체제를 운영했지만 임 회장의 임기만료로 등기이사에서 물러나면서 임 사장의 단독대표 체제가 출범했다.
임 사장은 지난 2010년 옛 한미약품의 분할 이후 존속법인인 한미사이언스의 대표이사로 선임된 바 있다.
한미약품은 임 회장이 R&D, 영업 등 전 부문을 총괄 지휘하지만 단계적으로 후계구도를 준비하는 분위기다. 현재 임성기 회장의 3남매 중 장녀 임주현 전무(42), 차남 임종훈 전무(39)는 각각 한미약품에서 인재개발과 경영기획 업무를 맡으며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한미사이언스의 보유 지분율은 임종윤 사장, 임주현 전무, 임종훈 전무가 각각 3.59%, 3.54%, 3.13%로 유사한 수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