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기획_도전하는 여성 (18)] “스타트업 캠퍼스 개척…청년들 ‘평생의 업’ 찾아줍니다”

입력 2016-11-1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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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인정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 이사장

▲아르콘이 운영하는 카페 블리스저니에서 포즈를 취한 허인정 아르콘 이사장.(사진제공 아르콘)
▲아르콘이 운영하는 카페 블리스저니에서 포즈를 취한 허인정 아르콘 이사장.(사진제공 아르콘)
서울의 동쪽, 성동구 성수동. 제화나 철물, 인쇄 공장이 많았던 곳으로 기억한다. 자주 가보진 않았어도 성수동의 느낌은 윙윙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고가를 지나가는 지하철, 옛 느낌을 풍기는 뚝섬 유원지 정도였다.

그런데 2016년 어느 순간 성수동은 뜨는 동네, 젊은이들의 동네, 이른바 ‘핫 플레이스’가 되어 있다. 사회적 목적을 갖고 혁신성에 기반한 운영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소셜 벤처(Social Venture)들이 속속 이 곳에서 탄생하고, 또 자라고 있다. 사회 혁신가를 발굴·육성·지원하거나 공간 중심의 사회 혁신 커뮤니티를 조성하겠다는 돈 안 될 것만 같은(실제로 비영리인 경우가 대부분) 재단, 기업들이나 저개발국의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고, 저소득층 청소년을 멘토링하는 곳들도 모여 있다. 지방에서 직접 공수한 식재료로 만든 밥을 파는 작은 식당도 있다. 공단 특유의 색깔이 여전히 남아있는 곳도 있지만 드문드문 젊은 에너지들이 꿈틀거리는 느낌은 성수동을 다시 방문케 하는 이유가 된다.

문화와 예술을 통해 사회에 공헌하겠다는 사명이 그대로 이름에 들어있는 사단법인 문화예술사회공헌네트워크(ART & COMMUNITY NETWORK: 아르콘)도 그곳에 있다. 아니, 더 정확하게는 성수동이 이렇게 변화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는 단체다. 아르콘을 세우고 이끌고 있는 이는 성수동 토박이라 불러도 무방할 허인정 이사장이다.

허인정 이사장을 만나기 위해 성수동 갈비골목을 지나 서울숲에 이르기 전 접어드는 작은 골목에 있는 카페를 찾았다. 여학생들이 카페 한쪽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카페가 한가할 만한 직장인들의 근무시간이라 그런가 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이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알고보니 이 곳은 아르콘이 청소년과 청년 진로탐색, 자립지원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카페였다. 허 이사장이 도착하자 약간 서툰 솜씨가 엿보이는 마카롱을 들고 와 쑥스럽게 맛보라고 권했다. 실습하며 만든 것이라며.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 났다.

허 이사장은 막 판교에서 돌아오는 참이었다. 김범수 카카오 의장이 카카오 주식 3만 주(약 30억 원)기부해 청년 일자리 혁신을 위해 만든 교육 플랫폼 ‘스타트업 캠퍼스’에 다녀온 것이다. 자금은 김범수 의장이 댔지만 이 캠퍼스를 돌아가게 하는 ‘소프트웨어’는 아르콘이 만들기 때문.

“청년들을 더 취직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업(業)을 찾거나 만들게 도와주자는 취지에서 만든 곳입니다. 업이란 좋아하고 재밌으면서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을 말하겠죠”

스타트업 캠퍼스의 교훈(?)은 용기, 지혜, 마음이다. 맞다, ‘오즈의 마법사’에 나오는 그 덕목. 캠퍼스에서 허 이사장은 도로시로 불린다.

“선수들(캠퍼스 수강자들을 지칭)이 오즈의 마법사에서 추구하는 용기, 지혜, 마음이란 잠재력을 찾길 원해요. 캠퍼스를 설명할 때 ‘아무도 가르치지 않지만 배우는 곳’이라고 해요. 김범수 의장도 그걸 원했어요. 가르치기만 하는 공간이지 않았으면 한다고. 그리고 뭔가를 하려면 그걸 할 수 있는 물리적인 공간이 참 중요해요. 이 곳에 와서 청년들이 서로 영감을 주고 받고 창의력을 충분히 키우고 하길 바라죠”

공간의 중요성을 얘기하자 올해 여름이 오기 전에 방문해서 허 이사장의 설명을 들었던 언더 스탠드 애비뉴(Under Stand Avenue)가 떠오른다. 아르콘이 운영하고 성동구가 지원하며 롯데면세점이 후원해 시작한 이 사회공헌 프로젝트는 취약계층의 자립과 청년창업, 행복한 가정과 일터를 위한 힐링 등 7가지의 자립(Stand)을 돕는다. 중고 콘테이너 박스를 재활용한 건물들로 이뤄진 언더 스탠드 애비뉴의 1200평 공간은 원래 쓸모없이 방치돼 있던 서울숲 옆 늪지였다고.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성수동에 살았지만 서울숲을 가볼 여유도 별로 없었고 그 옆 늪지는 우범 지역에 가까워 거들떠 보지도 않았는데 허 이사장은 공익 공간을 만들기 위한 구상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 최대 온라인 신발 쇼핑몰 자포스(Zappos) 창업자 토니 셰이의 ‘라스베이거스 다운타운 프로젝트’를 깊이 들여다 보게 됐다.

토이 셰이는 도시같은 일터를 만들고자 했고 카지노의 도시가 되면서 망가져버린 라스베이거스 구 도심을 재생해보기로 했다. 왜 그곳이었냐는 질문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 자포스가 그 곳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호텔 간판도 그대로 두고 콘테이너 박스로 건물을 만드는 등 별로 큰 돈과 품을 들이지 않고 많이 갈아엎지도 않으면서 주민들과 함께 병원과 교육, 공연, 스타트업 기업들도 공존하는 도시 공동체를 만들었다.

서울숲 옆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고, 현재의 직장도 이 곳에 있는 허 이사장도 이 곳을 택했다. 그리고 우범 지역에 가까웠던 늪지는 다양한 사람들의 열기로 북적이는 혁신적인 공간이 됐다. 이주여성 등 취약계층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통한 자립을 돕고, 신진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이 시민들에게 다양한 공연과 전시를 열면서 사업 가능성을 찾고 있으며 사회적 기업이나 청년 벤처들이 일할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다. 언더 스탠드 애비뉴에서 발생하는 수익은 자립 프로그램에 재투자한다. 단순한 공익 프로젝트 공간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지역 주민들 또는 이 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가치의 중요성을 일깨워 같이 지속가능하게 성장하자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신문기자 출신인 허 이사장이 CJ로 자리를 옮길 때, 그리고 ‘더 나은 미래’라는 공익 사업과 컨설팅을 해 왔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아르콘을 세우고 새로운 프로젝트들을 성큼성큼 시작하는 걸 보면 이런 도전 정신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기자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창의적인 발상을 하기보다는 사건과 현상을 수동적으로 분석하는데 급급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경제와 정보기술(IT) 산업 쪽 취재를 주로 하다가 사회부에 발령이 나서 소외된 이웃들의 실상을 취재하는 ‘마이너리티 리포트’ 시리즈를 하게 됐어요. 하다보니 기업과 NGO, 정부 모두 힘을 합쳐 도울 필요가 있겠다 싶었고 회사에서도 이걸 ‘우리 이웃’이란 캠페인으로 확장시켜 제가 팀장을 맡게 됐죠. 공부방 환경을 개선해주는 모금도 해보면서 기부나 사회적 사업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됐죠. 그러다가 이들이 참여하는 나눔 축제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 했는데 NGO측의 제안으로 루미나리에(현 루체비스타)를 기획하고 실행하는데 참여해보기도 했어요. 처음 해보는 거라 두렵다, 안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게 아니라 ‘재밌겠다’‘의미있겠다’는 생각부터 드는 편이에요. 해야겠다는 판단만 내리면 바로 시작해 버리죠”

CJ에 이어 더 나은 미래에서 7년을, 아르콘을 설립하고 6년째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새로운 일, 의미있다고 생각되는 일을 시작하는 데엔 겁이 나지 않는다고. 언더 스탠드 애비뉴도 성장 궤도에 올려놓고 나니 이제 스타트업 캠퍼스를 개척해내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쁘지만 행복하다고 한다.

방문할 때마다 달라지는 것 같은 성수동, 혹시 젠트리피케이션 우려는 없는지 물어봤다.

“분명 있죠. 하지만 지역주민이 떠나지 않고 임대를 하는 경우에는 임대료를 크게 높이지 않아요. 상생하려는 마음가짐이 있는거죠. 하지만 외부에서 이곳 건물을 사서 들어오거나 하면 임대료를 매우 많이 높이기도 해요. 그러나 성동구도 이를 방지하고자 하는 입장이라 다행이에요”

알아보니 성동구는 젠트리피케이션 방지를 위한 ‘서울특별시 성동구 지역공동체 상호협력 및 지속가능발전구역 지정에 관한 조례’를 만들기도 했다. 지속가능발전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에서는 토착 상인들로 구성된 주민협의체의 동의가 있어야만 신규 입점이 가능하도록 해 기존 상권이 망가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

허 이사장은 여기엔 이 곳을 선택하고 역시 ‘라스베이거스 다운타운 프로젝트’처럼 지역 주민들과 상생 발전을 도모하려 했던 비영리 사단법인 루트임팩트도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한다. 루트임팩트의 대표는 정주영 현대 창업주의 손자이자 정몽윤 현대해상 회장의 아들인 정경선씨다.

“최근 판교를 다니다보니 이 삭막한 공간을 또 어떻게 지역 주민들과 공존하면서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돼요. 자율주행차를 위한 공간도 있고 캠퍼스를 졸업하는 선수들이 어떻게 역할할 수 있을 지 고민도 해보구요. 그리고 이런 계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해야 같이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해요”

용기를 내어 오즈의 마법사를 찾아가는 도로시가 딱 그의 이런 캐릭터를 잘 설명해준다 싶다.

“이허수명(以虛受命)이란 말이 있어요. 마음을 비워 자신의 천명을 받아들인다는 말인데, 두려움에 움츠리기보다 새로운 것을 선택하고 맞이하는 저의 자세를 잘 설명하는 것 같아요. 손에 무얼 쥐고 있으면 새로운 걸 쥐어볼 수 없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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