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지금] 인간이 되고 싶다는 일왕의 ‘생전퇴위’ 메시지

입력 2016-09-05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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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일본에서 화제가 되는 이슈 중 하나는 일왕의 ‘생전퇴위’다. 일왕의 생전퇴위 문제는 7월 13일 일본에서 처음으로 보도되었고, 그 후 핫이슈가 돼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현행법상 생전퇴위는 가능한 것인지, 헌법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지 등 일본에서 특히 지식인 사이에서는 이런 문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졌다. 일본의 현행 ‘상징천황제’는 그런 사태를 상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 이번 일왕이 생전퇴위를 희망한 데 대해 일본 국민들이 대단히 놀란 것이다.

일왕 아키히토(明仁)는 올해 만 82세로 이미 상당한 고령이라 할 수 있다. 게다가 과거 전립선암 수술과 심장수술을 받아 건강에 전혀 문제없다고 하기가 어렵다. 한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일왕에게는 공무가 많다. 내각에서 결정한 사항에 대해 마지막 재가를 하고 관련 서류에 서명하여 도장을 찍는 일은 일왕의 주된 업무다. 그리고 일본 전국을 방문하여 어려운 사람들을 격려하는 일, 외국에서 국빈 자격으로 온 사람들을 맞이하는 역할 등 1년 내내 사실상 쉴 틈이 없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공무를 수행해 나가는 것이 부담이 될 상황이 된 것이다. 그런데 장남인 나루히토(德仁)가 이미 만 56세로, 1989년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할 때의 나이(당시 만55세)를 넘어섰다. 그런 여러 가지 상황을 숙고한 일왕이 생전에 세자에게 양위하는 생전퇴위 의향을 일본 궁내청 관계자들에게 전한 것이다.

왕위 승계 등을 정한 법률을 일본에서 ‘황실전범(皇室典範)’이라고 한다. 그러나 황실전범에는 생전퇴위에 관한 조항이 없다. 그러므로 생전퇴위를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황실전범 개정이 필요하다.

궁내청에서는 8월 8일 일왕의 생각을 담은 비디오 메시지를 국민에게 공개했다. 이 메시지에서 일왕이 생전퇴위를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생전퇴위를 강하게 희망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었다. 메시지의 중심은 역시 자신의 건강 문제였고 과거에도 일왕의 건강이 악화되었을 때 국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언급했다. 메시지 중 한국에서 많이 보도되지 않았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천황의 건강이 나빠지고 심각한 상태가 되면 지금까지도 볼 수 있듯이 사회가 정체되고 국민의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 우려됩니다. (중략) 그동안 왕실의 관습으로 천황의 종언에 즈음해서는 무거운 장례행사가 연일 거의 두 달에 걸쳐서 이어졌고 그 후 상의(喪儀)와 관련된 행사가 1년간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많은 행사와 신시대에 관한 여러 행사가 동시에 진행됨으로 인해 그 일과 관련된 사람들, 특히 남겨진 가족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이런 사태를 피할 수는 없을까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일왕이 솔직하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했다. 자신의 아버지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1989년 1월 사망함에 따라 일본 사회에 널리 퍼진 자숙의 분위기나 그때 즉위한 자신의 체험으로 나온 얘기인 것이다.

일왕은 정치적 기능을 갖지 않는다는 현행 헌법의 규정 때문에 일왕은 제도에 관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했으나 생전퇴위 의향을 강하게 어필했고 이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를 구했다.

이에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무겁게 받아들이겠다”라는 말로 수용을 시사했다. ‘황실전범’은 법률의 하나이므로 국회의 승인이 있으면 개정이 가능하다. 그러나 문제는 좀더 복잡하다. 원래 ‘황실전범’에 생전퇴위 규정이 없는 이유는 되도록 그런 사태를 피하고 싶다는 속셈이 있기 때문이다.

현재는 법률상 일왕의 사망에 따라 세자가 세습으로 즉위한다고 정해져 있다. 그 외의 퇴위나 양위는 상정되어 있지 않다. 그런 이유 중 하나는 생전퇴위나 양위를 인정한다면 일왕이 퇴위 후에도 상황(上皇)의 입장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 그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일본 역사를 되돌아보면 근대 헌법으로 생전퇴위 제도가 폐지된 1890년까지 59명의 일왕들이 생전퇴위를 했다. 그렇지만 많은 경우 현 아키히토 일왕이 언급한 일왕 사망 시의 사회적 혼란을 피하기 위한 퇴위 혹은 양위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므로 퇴위한 직후에 사망한 일왕도 몇 명 있었다. 물론 퇴위 후에 영향력을 행사해 무사정권과 대립한 일왕들도 있기는 했지만 많지 않다.

이런 일본의 역사를 감안하면 오히려 생전퇴위는 일왕 사망 직후의 사회적 정체를 피하기 위해 이미 역사적으로 실시돼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또 하나 우려되는 것은 일왕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퇴위를 강요당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는 왕실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일왕이 본의 아니게 강제 퇴위당한 사례가 적지 않다. 그리고 현행 헌법상 이번처럼 일왕 자신이 퇴위의 의향을 언급한 행위 자체가 헌법이 금한 일왕의 정치권력 행사가 아니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므로 생전퇴위를 법적으로 가능하게 한다고 해도 그것이 일본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매우 신중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번 일왕이 생전퇴위 혹은 양위의 의향을 표명함으로 인해 좀더 중요한 문제가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야기되었다. 그것은 메시지에서도 감지된다. 일왕은 “남겨진 가족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다”라고 걱정했다. 여기서 말하는 가족이란 일왕의 가족들, 특히 왕비와 세자 부부 그리고 손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아키히토 일왕은 자신이 중태에 빠진 후에 벌어지는 행사의 연속으로 자신의 가족들이 처할 어려움을 우려했다. 특히 고령인 왕비에 대한 배려가 가장 큰 것으로 보인다. 특히 현재의 미치코(美智子) 왕비는 역사상 처음으로 왕족이 아닌 일반인 중에서 아키히토가 직접 골라서 연애결혼을 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결혼 당시 왕족이 아님을 이유로 말이 안 되는 비판과 비난을 받아 고통이 컸다. 아키히토는 자신이 죽은 후에 왕비에 대해 일부 국민들이 다시 무례하게 굴까 우려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일본인들이 깜짝 놀란 것은 일왕이 그런 지극히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었다는 점이다. 일왕이라는 위치는 개인적인 발언이나 정치적인 발언이 금지된, 말하자면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적 인권 자체가 인정되지 않는 위치라는 사실이 있다. 일본 국민들이 이번 일왕의 발언으로 새삼스럽게 일왕이라는 존재의 불쌍함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많은 일본인들은 자신의 인권을 주장하기보다 자신의 의무에 대해 충실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일본의 국민성에는 기본적 인권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일왕의 존재가 사실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근대 이후의 일왕들은 그 위치가 요구하는 책임과 업무를 수행하는 것을 사실상 강요당해 왔고 국민에게 모범을 보여줘야 하는 존재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에는 일왕만큼 자유가 없는 존재가 없다. 그는 공무를 거부할 수 없고 세습이라는 정해진 법을 거부할 수 없으며 승계자로 정해지면 즉위해야만 하다. 헌법이 보장하는 직업 선택의 자유를 비롯해 일왕에게는 국민으로서의 권리는 하나도 없다. 한 번 즉위하면 죽을 때까지 모범적인 일왕으로 있어야 함을 강요당한다. 현재까지는 일왕 자체가 그런 입장을 감수해 왔기 때문에 이런 문제가 부각하지 않았다. 즉 일왕 자체의 문제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모르고 지냈다.

그러므로 일왕의 생전퇴위 발언을 제2의 ‘인간선언’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다. 1946년 1월 1일 당시 히로히토 일왕이 ‘인간선언’을 함으로써 ‘살아 있는 신’의 지위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이후 ‘상징천황제’는 일왕을 국민으로부터 분리하면서 ‘상징적인 신’임을 연출해 왔다. 그 제도가 일반 국민들에게도 자신의 인간적인 주장을 억제하게 했고 자신의 임무에 충실하라는 메시지를 계속 던지고 있었다. 그러나 아키히토는 자신의 가족, 특히 아내를 배려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것이 일본인의 심리에 주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바로 일본의 국민성 변화나 좀더 진정한 민주화의 신호탄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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