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룡(1914.8.3~1987.1.9)은 수많은 국민가요를 남긴 대중음악 작곡가 겸 가수다. “그는 민요와 대중가요를 절묘하게 접목해 곡을 만들었는데 그런 작곡 기법이 대중의 사랑을 받게 한 원동력”이라고 평론가 윤중강 씨는 분석했다
이봉룡은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가족 생계에 관심이 없는 아버지 대신 어머니가 집안을 꾸려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레코드 가게를 운영했다. 특히 ‘목포의 눈물’을 부른 여동생 이난영을 대가수로 키웠다. 그는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면서 작곡도 했는데 이게 대박을 쳤다. 남인수가 부른 ‘낙화유수’와 ‘남아일생’이 대표적이다.
해방 이후에는 남북 분단의 아픔을 절절히 그린 ‘달도 하나 해도 하나’를 내놔 좋은 반응을 얻었다. 한국전쟁 때 이난영의 남편 김해송이 북한으로 끌려갔는데, 전쟁이 끝나도 사살됐다는 소문만 무성하고 남한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월북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김해송의 곡들은 대중 앞에서 공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의 곡 가운데 이봉룡이 작곡한 것으로 작곡가 이름을 변경해 살아남은 곡도 있었다. ‘연락선은 떠난다’(장세정 노래), ‘선창’(고운봉 노래), ‘고향설’(백년설 노래) 등 꽤 많다.
나중에 이난영과 김해송의 딸들이 만든 원조 아이돌 그룹 ‘김시스터즈’의 멤버로 그의 딸도 활동했다. 1956년 대한레코드작가협회 부회장으로 뽑혔고, 1958년에는 ‘센츄리레코드’ 전속 작곡가가 됐다. 이후 자신이 직접 음반 기업 ‘엘케엘(LKL)레코드’를 운영하다가 1969년 딸 초청으로 미국에 이민한 뒤 사업 및 작곡을 중단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마지막 필적’(이화자 노래), ‘아가씨 위문’(장세정 노래) 같은 군국가요를 작곡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