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전 회장도 경제관료 출신이지만 1983년부터 5년간 한신증권(동원증권→현 한국투자증권) 사장을 지낸 뒤 협회장에 오른 것이 과거 회장들과는 차이점이다.
그는 선임 직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업계에서 대표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회원사들의 여론을 정부가 받아들였다”며 자신의 선임 배경을 설명했다.
◇증권투자자보호센터 설립 등 협회 체제정비= 김 전 회장 시절부터 협회를 중심으로 한 증권시장 선진화가 본격 추진됐다.
증권투자자보호센터 설립은 그가 시장 선진화를 이끈 업무 중 하나다. 김 전 회장은 1989년 3월 투자자보호센터를 개설해 일반투자자와 직접 접촉하는 민원상담 업무를 시작했다.
이전까지는 증권 시장 성장과 투자 인구 증가에도 증권사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사항이나 분쟁을 중재할 창구가 없었다. 당시 주식 거래 대부분은 증권사 창구를 통해 이뤄졌다. 이 때문에 증권사 직원과 고객 간에 오가는 다툼을 줄이려면 소비자 민원기구가 절실했던 상황이었다.
투자자보호센터는 설치 이후 10개월 동안 모두 1592건 등 한 달 평균 150여건의 일반상담 및 애로사항을 접수했다. 이 중 전화상담은 1472건(92.5%)로 가장 많았으며 이어 편지상담(41건), 보호센터 방문(79건) 순이었다.
투자자보호센터를 통해 제도가 개선된 사례도 있었다. 센터가 설립되기 전에는 증권사의 입출금 시간은 평일 오전 10시10분~10시40분, 오후 3시~4시로 제한돼 있었다. 그러나 센터는 소비자 제안을 접수해 증권사의 입출금 시간을 평일 오전 10시10분~오후 4시, 토요일 오전 10시10분~오후 1시로 확대했다.
◇점포신설 기준 상향 등 자율규제 강화 = 김 전 회장은 협회의 자율규제 기능도 강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자본시장이 활황을 맞던 시기였다. 1989년 4월 1일에는 종합주가지수가 1000포인트를 처음으로 돌파했다. 1985년 말 342개였던 상장사는 1990년 669개로 늘었다. 같은 기간 상장사의 자본금 총액도 4조6654억원에서 23조9816억원으로 5년 만에 5.1배 뛰었다.
이처럼 자본시장이 성장세가 가파르자 증권사의 과당 경쟁이 문제가 됐다. 증권사들이 같은 장소에 나란히 점포를 개설하는 등 이들 간의 갈등도 적지 않게 일어났다.
이에 김 전 회장은 당국과 협의를 통해 점포신설 자율화 방침은 유지하되 자기자본과 지역별 점포 수를 고려, 신설 기준을 대폭 강화했다. 그는 또 그동안 활동이 전무했던 증권공정거래추진위원회의 운영도 활성화해 자율 규제의 논의를 본격화했다.
취임 2년차였던 1989년 김 전 회장은 “자율화, 개발화 흐름 속에서 민간의 역할이 경제 운용에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며 “자율적이고 건전한 경쟁 풍토 조성에 앞장서는 것”이라고 언론을 통해 밝혔다.
◇재무부 ‘수요회’ 출신, 두 번째 임기 때는 돌연 고문으로= 김 전 회장이 정부와의 소통을 기반으로 협회의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그가 재무부 ‘수요회’ 출신이란 배경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재무부 출신들의 모임인 재우회에는 수요회란 방계 조직이 있었다. 매달 마지막주 수요일에 점심을 같이 한다는 이유로 붙여진 이름이다. 1983년 시작한 이 모임에는 김 회장을 비롯해 고(故) 김원기 경제기획원 전 장관, 고(故) 정춘택 은행감독원장,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 등이 함께했다.
하지만 그의 영향력은 장수하지는 못했다. 김 전 회장은 1990년 3월 30일 임기를 2년 앞둔 상황에서 고문으로 물러났다. 대신 증권업계 대부로 불린 강성진 당시 삼보증권 고문이 협회장 자리에 올랐다. 노태우 정권 시절 김 전 회장이 당시 김영삼 민자당 최고위원과 경남고 동기 동창이란 점이 정부가 그를 고문으로 물러나게 한 배경으로 추측되고 있다.
김 전 회장은 2001년 8월 6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