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또 한번 존재가치를 시험받고 있다. 해묵은 독립성·중립성 문제는 그나마 고상한 논쟁이다. 현 정부들어 한은을 졸(卒)로 보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어서다.
강봉균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의 개인생각일 것이라고 언급했던 유일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도 “일리 있다”며 한발 물러섰다. 정부에서는 한은이 산업은행에 출자하는 안을 고려한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방식이야 어떻든 결국 한은 더러 발권력을 동원, 돈을 풀라는 주문이다. 여당과 정부입장에서는 합목적성을 떠나 가장 간편한 절차이기도 하다.
우선 정부 재정으로 돈 풀기를 하자니 재정건전성이 우려된다. 또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자니 매번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 동의 절차가 까다롭기 때문이다.
한은 발권력은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7명중 과반인 4명만 동의하면 된다. 그렇잖아도 이달 21일부터 임기가 시작되는 4명의 신임 금통위원들의 면면을 보면 박 대통령이 당선인 시절 인수위에 몸담았던 인물부터 친 정부 인사로 꾸려진 비둘기(완화적 정책) 둥지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중이다.
◆ 박근혜정부 출범 초기부터 인하 압박
2013년 박근혜정부 출범 초기부터 정부는 한은에 금리인하를 압박한 바 있다. 당시 총액한도대출(현 금융중개지원대출) 증액으로 버티던 김중수 전 총재는 한달만에 굴복해 그해 5월 금리인하에 나선다. 당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5월 금통위 직전인 5월8일 “자칫 청개구리 심리를 갖고 있거나 호주산 (나무)늘보의 행태를 보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김 전 총재를 향해 직격탄을 날렸다. 여당 원내대표라지만 일국의 중앙은행 총재를 완전히 깔아뭉갠 셈이다.
이같은 일이 벌어진 이후 채권시장에서는 김 전 총재의 금통위를 주목하지 않았다. 이명박(MB) 대통령시절 이성태 전 총재가 그랬듯, 박근혜 대통령 취임후 김 전 총재 역시 암묵적인 사퇴압력에 시달리기도 했다. 모두 직전 정권에서 임명해 자기사람이 아니라는 인식이 깔려 있어 빚어진 일이다.
2014년 초 사상 처음으로 인사 청문회를 거친 이주열 현 총재의 출발은 깔끔했다. 인사 청문회만 하면 줄줄이 낙마하던 박근혜정부에서 유일하게 청문회 당일 여야 만장일치로 통과된 인물이 바로 이 총재이기 때문이다. 또 그가 정통 한은맨이라는 점에서 채권시장에서도 “(김)중수 가고 고수가 왔다”며 환호했었다.
◆ 정권실세 최경환 부총리의 경기부양에 백기
취임초기 세월호 사태가 터지고 나서도 “향후 방향성은 금리인상”이라고 말하던 이 총재의 위상이 추락한 건 그해 여름 정권 실세인 최경환 전 부총리 취임이후 부터다. 최 전 부총리 취임직후 두 사람 회동에서부터 이 총재가 밀렸다.
당시 회동에 참여했던 전직 한은 인사는 당시를 “한번의 금리인하로는 안될 분위기였다”고 전하기도 했었다. 실제 최 부총리 취임직후인 그해 7월말과 8월초 한은은 금융중개지원대출 한도를 확대하고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앞서 그해 7월엔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최고위원도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당 최고위원회 회의와 유세장에서 공공연히 금리인하를 외쳤었다.
금리인하 이후 한달이 지난 그해 9월에도 최 전 부총리의 한은 압박은 계속됐다. 당시 호주에서 열린 주요20개국(G20) 회의에서 최 전 부총리는 이 총재와의 와인회동을 공개하며 “(금리인하는) 척하면 척”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같은 발언이 귓전에 가시기도 전인 그해 10월 한은은 또 금리인하를 단행했다.
2015년 초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선다. 그해 1월12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금리 인하와 관련해서는 거시 정책을 담당하는 기관들하고 잘 협의를 해서 시기를 놓치지 않고 적기에 대응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었다.
결국 그해 3월 금통위에서 추가 금리인하가 이뤄지며 기준금리는 글로벌 금융위기 때(2.00%)보다도 낮은 1%대로 주저앉았다. 금융중개지원대출의 추가 확대도 이뤄졌다.
이밖에도 한은은 새누리당의 이번 공약 취지와 같은 맥락에서 지난해 회사채정상화방안과 관련해 산업은행에 3조4300억원 대출 취급하고 통안채 1년물 3조4500억원을 상대매출한 바 있다. 또 주택금융공사에도 2000억원 규모의 추가 출자와 주금공 주택저당증권(MBS)을 한은 환매조건부채권(RP) 매입대상증권에 포함시키기도 했었다.
◆ 한은 내부 “이번엔 달라야”
총선 와중에 한은이 논란의 중심에 서면서 한은 내부에서도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우선 이 총재는 지난달말 취임 2주년 기념 기자간담회 당시 “특정 정당의 공약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한 금통위원도 사견임을 전제로 “그런 상황인지는 금통위가 판단할 일”이라면서도 “통화신용정책에 관한 결정은 금통위가 하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은 노동조합도 위원장 명의로 반대 성명을 냈다.
반면 과거 한은이 ‘특별융자’를 실시할 때 돈만 내고 아무 역할을 못한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목소리도 흘러 나왔다. 한은의 한 관계자는 “선거후 여당과 정부가 한은에 신세좀 지겠다는 것”이라며 “과거 특융지원시와 달리 이왕 발권력을 동원하는 상황이라면 한은 자금을 지원받는 산업은행은 물론 기업들을 감시감독하는 역할을 한은이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은 고위관계자도 “협상을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며 대응책 마련에 고심하는 분위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