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십팔번’을 외치는 이들이 많다. 물론 학교가 아니라 전 국민의 놀이터인 노래방에서다. 가수 강산에는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을 볼 수는 없었지만/ 그 노래만은 너무 잘 아는 건 내 아버지 레퍼토리 그중에 십팔번이기 때문에…”(‘라구요’ 1992년)라고 실향민 아버지의 애창곡이 ‘눈물젖은 두만강’이었다는 내용의 노래를 구성지게 불렀다.
선친께서 젊은 시절 자주 부르시던 노래는 백년설의 ‘나그네 설움’이다. 고교 진학 때문에 일찍 시작한 객지 생활의 외로움을 절절한 노랫말과 음률에 담아 풀었던 듯하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없는 이 발길/지나온 자욱마다 눈물 고였다/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의 1절보다 “타관땅 밟아서 돈 지 십년 넘어 반평생/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황혼이 찾아들면 고향도 그리워져/눈물로 끈을 풀어 찾아도 보네”의 2절을 부르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더욱더 애달펐다.
그런데 가장 즐겨 부르거나 잘하는 노래를 왜 ‘십팔번’이라고 할까? ‘십팔번’은 일본 문화로, 전통 가극 가부키(歌舞伎)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본에서 가부키 하면 이치가와 가문이 첫손에 꼽힌다. 에도(江戶) 시대에 등장한 가부키의 원조 배우 이치가와 단주로의 후손이 집안에서 내려온 단막극 중 재미있는 18가지 기예(技藝)를 뽑아 정리했는데, 이를 사람들이 ‘가부키 교겐(狂言, 재미있는 말) 십팔번’이라고 했다. 또 18가지 기예 중 18번째 기예가 가장 재미있어서 ‘십팔번’이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설도 전해진다. 십팔번은 이후 자주 부르는 노래, 자신 있는 특기 등의 뜻으로 전용됐고, 우리나라로 흘러 들어오면서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라는 의미로 와전됐다.
‘십팔번’의 유래를 알았으니 이제 더 이상 쓸 이유가 없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이 내놓은 ‘십팔번’의 순화어에 또 한 번 한숨이 나온다. 십팔번 대신 ‘단골 노래’, ‘단골 장기’로 쓰라는 것이다. 단골은 손님, 가게, 무당 등의 단어에 어울리는 말이다. 따라서 노래를 이야기하면서 이 말을 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보다는 애창곡, 장기로 고쳐 쓰는 것이 적절하다.
가라오케 역시 일본이 만든 조어로, 써서는 안 될 말이다. 가짜를 의미하는 ‘가라(空)’에 오케스트라의 줄임말 ‘오케(オケ)’를 합성한 것으로 ‘가짜 오케스트라’를 뜻한다. 일본의 최대 수출품답게 세계 어디를 가도 통용되는 말이긴 하나 영어 단어의 머리만 툭 잘라 쓴 국적 없는 불구의 말일 뿐이다.
연말 송년 모임으로 노래방을 찾는 이들이 많아지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애창곡이 새삼 떠오르고 있단다.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청산에 살리라’를 비롯해 노태우 전 대통령의 ‘베사메무초’,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목포의 눈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작은 연인들’ 등이다. 그러고 보니 애창곡에는 시대적 상황과 개인이 걸어온 길을 통한 취향이 담겨 있는 듯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