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메마를수록 순수한 감성에 목이 마른다. 가슴을 적시는 애잔한 사랑이야기에 울컥해보고 싶을 때도 있다. 눈물로 이별을 고했던 나의 지난 사랑도 짠하게 아름답기만 하다. <국화꽃향기>가 생각나는 까닭도 그러하다. 김하인의 감성멜로에 추억을 떠올리는 이가 있듯, 그에게도 순수하던 그 시절의 책갈피 같은 책 한 권이 있다. 볼프강 보르헤르트(Wolfgang Borchert)의 <이별 없는 세대>다.
폐허냄새가 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이로부터
20대 중후반 쯤 만나던 여자에게서 <이별 없는 세대>를 선물 받았다. 문학을 정말 좋아하던 아이였다. 술도 같이 많이 마셨고, 담배도 그 아이에게서 배웠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혼자 담배를 필 적이면 가끔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는 그녀를 ‘폐허냄새가 나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이’로 기억한다. 그런 그녀를 만나던 시절, 그는 한창 시를 썼다.
“오늘 같은 날, 술자리에서 그 애가 ‘오늘 날씨가 쌀쌀해’, ‘꽃이 예쁘다’라고 운을 띄우면 나는 술을 먹다가도 즉석에서 시를 썼다. 목소리가 좋았던 그 여자는 내가 쓴 시를 바로 낭송해주곤 했다. 그 아이의 시를 들으면서 술을 마시면 술맛이 좋았던 기억이 난다.”
대학시절 신춘문예 3관왕을 거머쥔 그였지만 막상 문학인의 길은 맹렬한 정글과도 같았다. 사범대를 나온 그의 동기들은 이미 교사가 되어 안정적인 수입과 사회인으로서의 대접을 받고 있었다.
“꾸준히 글을 썼지만 이렇다 할 수입이 없던 그 시절, 나는 가난의 바닥을 치고 있었다. 현실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고, 그 아이와는 오래 만나지 못하고 헤어졌다. 그래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내 자신이 비장하고 멋있기는 하다. 나는 그때 내가 마흔까지 살면 잘 살리라 생각했다. 5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기 때문에 건장한 형들이 많으니 나 하나쯤은 내가 꽂히는 것(문학)에 의해 멸망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좋게 말하면 독기였고, 형들 표현으로는 ‘너는 병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내걸 수 있는 것이라곤 달랑 목숨 하나뿐이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그는 어느 시점엔가 선회를 했다. 더 이상 문학지상주의에 취하지 않고 ‘문학도 직업이고 현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잘 표현해 낼 수 있는 사람, 사랑 이야기 쪽으로 돌아섰다.
“그때를 떠올려 보면 나도 나름 풍부한 연애를 했다. 내가 보낸 여자들을 떠올려보면 그때의 애틋함이 살아나고, 그런 감정과 이미지를 하나씩 가져와 멜로소설을 썼다. 그랬기 때문에 글을 쓰며 인위적으로 짜 맞추려 하지 않아도 감정의 흐름을 표현해 낼 수 있었다.”
이별 없는 세대로부터
그는 <이별 없는 세대>를 처음 읽고 ‘문체가 굉장히 좋고 미려하다’ 느꼈다. 책의 저자 볼프강 보르헤르트(1921~1947)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느낀 단상들을 회화적으로 풀어낸다. 존재에 대한 성찰, 외압적인 폭력과 전쟁 등에서 오는 무위와 슬픔에 대해 구어적 표현보다는 미세한 느낌만을 담았다. 그는 글을 읽노라면 ‘금속적인 전쟁의 차가움’, ‘북유럽 날씨의 칙칙함’, ‘담배연기’ 등이 떠오른다 했다.
“저자는 굉장히 서정적인 사람인데 전쟁을 경험한 뒤 상처를 입고 ‘사는 게 뭘까’라는 허무함에 빠지게 된다. 요즘 사람들도 출근전쟁, 취업전쟁 등 일상에 전쟁이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며 숨 가쁘게 살아간다. 이 책은 그런 작은 전쟁들 속에서 인간이 ‘왜 사는가’에 대한 그 본질, 자아와 타인의 관계 특히 자기 내면에 대해 성찰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한다. 인간이 통찰력이 있으면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의 연속을 보듬고 살아갈 수 있다. 때문에 당시에도 현대에도 이 책이 주는 메시지는 통하는 것이다.”
그는 존재의 성찰을 원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한다. “‘내가 왜 사는가’, ‘국가와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 ‘인간의 야망과 폭력은 무엇인가’라는 구조적 성찰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물론 책에서 답을 주지 않지만, 한 번쯤 고개를 숙여보고 생각하게 만든다. 그게 시작이다. 여기에 자신의 지식의 총량을 동원해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 나에 대해 측은히 생각하고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주변사람과의 관계에 대해 측은지심이 발동하면 그게 인문학으로 가는 본질이다.”
그는 <이별 없는 세대>를 ‘아주 순수하고 맑은 청년정신이 느껴지는 책’이라 표현했다. 처음 읽었을 때와 자신의 상황은 달라진 부분은 있지만, 존재의 무의미성, 자기성찰 등에 있어서 주는 메시지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내 나이가 쉰을 넘었지만 내 생각의 70~80%는 여전히 20대 중반에 머물러 있다. 그때의 사고와 정신의 힘으로 평생을 산다. 나이가 들어 외향이 변하고 강개함은 늘어났을지 몰라도 내 마음은 늘 20대다. 우리 아버지가 ‘사람 마음은 늘 안 늙는 거다’라고 말씀하시곤 했는데 그 당시는 이해를 못했다. 어른이 되면 풍채도 우람해지고 빌딩도 짓고 생각도 점점 거대해지는 줄 알았는데 말이다.”
김하인으로부터
지난해 그는 ‘김하인 아트홀’을 운영하고 있는 강원도 고성에 국화꽃향기 협동조합을 출범시켰다. “강원도에는 민간협동조합이 262개나 있다는데 고성에서는 ‘국화꽃향기’가 첫 번째 민간 협동조합이다. ‘첫사랑’이라는 이미지를 떠올렸을 만큼 자연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지역인데 침체되고 움직임이 없어 안타깝다. 문화예술을 기반으로 하는 국화꽃향기 협동조합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고성을 찾아 삶을 재미나고 즐겁게, 또 가능하면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문화를 향유하면서 살아갔으면 한다.”
그에게는 또 다른 바람이 있다. 지난해 말 다시 펴낸 <국화꽃향기>를 시작으로 그동안 사랑받았던 그의 소설들을 다시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것이다.
“초창기 때 내가 쓴 글들을 보면 문장력도 어설프고, 치기어린 모습도 보이지만 옹달샘을 발견하듯 아주 깨끗하고 순수한 맛이 살아 있다. 때문에 나는 당시 내 글들에 대해 별로 고칠 생각이 없다. 세상이 흉흉하고 악이 판을 칠수록 그 반대 끄트머리에 있는 이들은 순수로의 회귀를 원한다. 그들에게 내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맑은 수채화 같은 내 초창기 작품들을 통해 따뜻한 위로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