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에 들어서자 제작진이 손수건을 판매하고 있었다. 관객의 눈물샘을 얼마나 독하게 자극할지 걱정이 앞섰다. 비장한 마음을 품은 덕에 지역 사투리를 이용한 코믹 연기, 배우들의 의도된 과장 연기에 크게 웃을 수 있었다. ‘푸르른 날에’는 1980년 계엄군의 잔혹한 폭력과 고문을 생생하게 재연해 광주의 고통이 단지 과거가 아닌, 지난 세월을 돌아보면서 오늘을, 내일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무대엔 30년 넘은 세월을 의미하듯 긴 다탁이 가로놓여 있다. 인물들은 팔을 뻗어 찻잔을 잡기에도 힘들 정도로 벌어진 사이를 두고 관계를 이어간다. 무대 후면의 사천왕상과 북소리, 아득한 기억 속의 뻐꾸기 울음이 1980년 5월 그날로 이끌었다. 극 마지막 서정주의 가슴 뭉클한 시 ‘푸르른 날’이 송창식의 굵고 낮은 목소리를 타고 울려퍼졌을 땐 가슴이 벅차오르다 못해 터져버렸다.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푸르른 날에’가 이토록 슬픈 노래인지 처음 알았다. 그런데 노래의 핵심 표현인 ‘푸르른’은 한글맞춤법상 바르지 못한 말이다. 맑은 가을 하늘이나 깊은 바다 또는 풀의 빛깔과 같이 밝고 선명하다는 의미의 말은 ‘푸르다’이기 때문이다. 불규칙 용언인 까닭에 ‘푸르러’(푸르+어→푸르러)의 글꼴은 존재하나 ‘푸른’, ‘푸르니’ 등의 형태로 활용된다. ‘푸르른’이 바른 글꼴이 되려면 ‘푸르르다’라는 말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말은 없다. 따라서 ‘푸른 숲’, ‘푸른 언덕’, ‘푸른 하늘’ 등으로 표기해야 한다.
물론 시, 노랫말 등 예술적 표현은 인정한다. ‘눈이 부시게 푸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솔아 솔아 푸른 솔아’라고 읊어보자. 리듬이 깨져 영 맛이 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호흡마저 끊긴다. 시의 생명인 운율 때문이다. 그래서 ‘시적 허용’이 있는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34주년을 앞두고 국민 10명 중 6명이 ‘임을 위한 행진곡’의 기념곡 지정에 찬성했음에도 국론분열을 운운하며 기념곡 지정을 회피하는 정부와 여당의 태도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묻고 싶다. 광주 망월동 민주묘지를 찾아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인생의 푸른 날을 역사에 빼앗긴, 그래서 푸른 날을 노래할 수도 없었던 이들을 그리워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