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건호 파인스트리트그룹 회장을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자금조달의 달인’이다.
그는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와 콜럼비아(Columbia) 대학교에서 물리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뒤 1979년 시티은행의 모회사인 시티코프(Citi Corp.) 입사해 금융업에 첫 발을 내딛었다.
한국의 금융산업에 관심을 가진 때는 1980년대 초 차관업무를 담당하면서 부터다. 한국 경제개발(인프라)에 필요한 외환, 산업, 수출입 자금조달 업무를 수행하며 프로젝트당 3~5억 달러(한화 3000억~5000억원)에 달하는 ‘빅딜’을 도맡았다.
1989년 시티그룹을 떠나 리먼브라더스로 자리를 옮기면서 국내 금융산업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조 회장은 동북아시아 투자은행(IB) 헤드로 일하면서 외국인에게 한국 전환사채를 주선했다. 첫번째 연결고리는 한국전력이었다. 1990년대 초 한국전력은 전력 소비량 증가에 따른 발전시설 확충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했다. 은행을 통한 차입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조 회장은 외국 채권 발행을 조언했다. 이를 위해 외국 신평사로부터 신용등급을 받을 수 있게 알선해 줬다. 국내 기업 중 최초다. 리파이낸싱(재융자)을 통해 1조4100억원 규모의 글로벌 채권을 발행도 주도했다. 근거 규정이 없었지만 한달간 끈질기게 재정부 담당자를 찾아가 설득했고 결국 발행 허가를 받아냈다.
외환위기 당시에는 뉴욕 리먼브라더스 본사와 힘을 합쳐 한국 은행들의 구조조정 자문 업무를 시작했다. 처음으로 자문을 맡은 곳이 우리은행 전신인 한빛은행. 그는 대우그룹 부도사태 속에서도 미국 시장에서 1억달러(한화 1000억원) 주식발행을 성공적으로 완료했다. 이후 국내 기업 구조조정 ‘빅딜’은 조 회장을 필두로 리먼브라더스가 도맡았다. 이때 LG그룹의 자문을 맡으면서 우리투자증권과(전 LG증권)과도 연을 맺었다.
2000년 리먼브라더스 아시아 CEO로 오른뒤 2007에는 글로벌 본사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아시아인으로서는 최초였다. 이후 2009년 홍콩 밀레니엄파트너스란 헤지펀드(퀄리티 톱5) 아시아 CEO로 자리를 옮겼다. 이 회사는 조 회장 재임 시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운용자산비중이 5%에서 15%로 증가했으며 같은기간 회사의 전체 자산 중 아시아태평양투자자 자산 비중이 0%에서 10%로 성장하는 성과를 이뤘다.
지난해 말 윤영각 회장(전 삼정KPMG 회장)과 함께 대체투자전문회사 파인스트리트그룹을 세운 조 회장은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투자증권 인수전에 집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