밴쿠버 대회 전은 인고의 시간이었다. 1948년부터 출전 대회마다 세계 수준의 높은 벽을 실감하며 무려 44년간 노메달 수모를 겪었다. 스포츠외교에서도 높은 벽을 실감했다. 강원 평창에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해 두 번의 좌절을 겪어야 했다.
해방이후 첫 번째 올림픽은 1948년 생모리츠(스위스) 대회다. 당시 임원 2명과 선수 3명을 파견했지만 성적보다 참가에 의미가 있었다.
1952년 오슬로(노르웨이) 대회는 한국전쟁으로 불참했다. 4년 뒤 코르티나담페초(이탈리아) 대회는 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지만 역시 참가에 만족해야 했다.
이후 대한민국은 동계올림픽에서 단 하나의 메달도 따내지 못했다. 1970년대 중반 들어서야 첫 메달에 대한 기대감을 가질 수 있었다. ‘빙상스타’ 이영하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대감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1976 인스브루크(이탈리아) 대회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5000m에서 11위에 오른 것이 최고 성적이다.
1988 캘거리(캐나다) 대회는 임원 18명과 선수 28명을 파견, 첫 메달에 도전했지만 또 다시 메달 획득에 실패했다. 당시 스피드스케이팅 기대주였던 배기태는 남자 500m에서 5위, 1000m에서도 9위에 머물렀다.
그러나 성과는 있었다. 시범종목으로 열린 쇼트트랙 남자 1500m와 3000m에서 김기훈, 이준호가 각각 금메달을 차지, 앞으로 열릴 올림픽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렸다.
1992년 알베르빌(노르웨이) 대회에서는 44년간의 간절했던 꿈이 이루어졌다. 김윤만이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000m에서 은메달을 딴 것이다. 대한민국에 첫 메달이었다.
기대했던 쇼트트랙에서도 사상 첫 금메달이 나왔다. 남자 1000m와 5000m 계주에서 두 개의 금메달과 한 개의 은메달을 획득, 역대 최고 성적을 기록했다.
이후 쇼트트랙은 대한민국의 ‘메달밭’이 됐다. 2006년 토리노(이탈리아) 대회에서는 금메달 6개, 은메달 3개, 동메달 2개로 총 11개의 메달을 쓸어 담았다.
그러나 ‘메달밭’인 쇼트트랙에 대한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았다. 11개의 금메달 중 이강석(스피드스케이팅)이 획득한 동메달 한 개를 제외한 모든 메달이 쇼트트랙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토리노 대회까지 인고의 시간이었다면 2010 밴쿠버(캐나다) 대회부터는 웅비의 시기다. 딴 나라 이야기 같았던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이 현실이 됐다. 이듬해인 2011년에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하며 기적의 시나리오를 써내려가고 있다.
특히 밴쿠버 대회는 대한민국 체육사에 한 획을 그었다. 쇼트트랙뿐 아니라 스피드스케이팅과 피겨스케이팅 등 주요 종목에서 메달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모태범과 이상화는 스피드스케이팅 남녀 500m에서 각각 금메달을 따냈고, 이승훈은 스피드스케이팅 남자 1만m에서 금메달을 따내 52년간의 노골드 한을 풀었다.
밴쿠버의 영광은 이듬해 지구 반대편으로 이어졌다. 2011년 7월 7일 새벽.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가 열린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강원 평창이 세 번의 도전 끝에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은 이로써 4대 스포츠 이벤트인 동·하계 올림픽과 FIFA월드컵, 세계육상선수권대회를 모두 유치한 6번째 ‘그랜드슬램’ 국가가 됐다. 지금까지 4대 스포츠 이벤트를 모두 개최한 나라는 독일·러시아·이탈리아·일본·프랑스 등 5개국뿐이다.
대한민국이 동계올림픽에 첫 도전장을 던진 1948년 생모리츠 대회 이후 약 50여년만에 이룬 성과다. 50여년 간 대한민국 동계스포츠가 걸어온 발자취를 되짚어보면 그야말로 기적에 가깝다. 그러나 꿈나무 발굴과 비인기 종목 육성 등 진정한 동계스포츠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아직 갈길이 멀다.
대한민국 동계스포츠의 ‘기적의 시나리오’는 이제부터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