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대재해 예방시스템·매뉴얼 있다면 무혐의 당연"
“경찰대를 다니던 당시 어머니의 마지막 유언이 마음에 남습니다. ‘사법고시에 통과해 더 큰 사람이 되라’는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파출소장을 끝으로 경찰 조직을 떠났습니다. 사법고시를 거쳐 검사가 된 뒤 27년간 국가를 생각하고 살아왔는데 이제는 공직의 무게를 내려놓고 변호사로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고 싶습니다.”
노정환(사법연수원 26기) 변호사가 울산지검장을 끝으로 공직생활을 마무리하고 법률사무소 ‘행복한 동행’ 대표변호사로 새출발했다. '첫 경찰대 출신 검사장’이라는 타이틀을 ‘검찰과 경찰의 행복한 동행’이라는 뜻을 담았다. 의뢰인이 변호사와 행복한 동행을 하자는 의미도 있다.
경남 창녕 출신인 노 변호사는 경찰대에 수석으로 입학한 뒤 파출소장으로 근무하다 1994년 사법시험에 합격, 사법연수원 26기를 수료하고 1997년 검사로 임용됐다.
사법고시 시작은 어머니와의 약속 때문이었지만 청주·대전·울산지검 등 3개 검찰청에서 검사장을 거치면서 후배 검사들 사이에서 존경받는 선배가 됐다.
노 변호사의 사무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동판이 걸려 있다. 수백여 명의 후배 검사들이 남겨준 마지막 인사 글귀가 빽빽하게 담겼다. 노 변호사는 “울산지검에서 작별 인사를 하겠다며 찾아온 많은 후배 검사들이 눈물을 흘렸다. 저 역시 울컥했지만 눈물을 참느라 힘들었다”며 “천직을 그만두게 돼 섭섭한 점도 있지만 공직의 무게를 내려놓게 되어 홀가분하다”고 소회를 밝혔다.
노 변호사의 사직은 갑작스러운 게 아니다. 오래 전부터 사직을 각오했다. 약 10년 전 ‘유우성 간첩사건’으로 검찰은 정치적 논란의 중심에 서게 됐고 당시 사건의 책임자가 된 노 변호사는 사표를 작성했다. 수사 결과에 따라 정치적인 공격을 받고 검찰을 떠나게 되더라도 당당하게 나가겠다는 생각으로 써내려간 것이다.
이 사건이 끝난 뒤 다른 대형 사건을 처리할 때마다 그는 작성해뒀던 사표를 마음에 품은 채 일을 했다. 언젠가 소임을 다 했다고 생각될 때 사표를 내겠다는 각오를 다졌고 그렇게 올해 9월 검찰 생활을 마무리하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검찰에서 오랜 기간 근무한 만큼 그의 손을 거친 사건도 상당하다. 대검찰청 공안부에서 근무하던 당시에는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와 미군 철수를 외치는 전국적인 정치 파업이 잦았는데, 이를 엄격하게 다루며 정치파업 근절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중앙지검 특수부에서는 재건축조합 비리사건과 국방부 납품비리 사건, 시민단체 비리사건 등 다양한 반부패 사건을 처리했고, 외사부장 시절에는 ‘유우성 간첩 국정원 증거조작 사건’을 파헤쳤다. 전두환 비자금 특별환수팀을 이끌며 수백억 원의 현금을 환수하고 숨겨둔 미술품을 찾아내 경매에 넘겨 100억 원을 환수하기도 했다.
노 변호사가 가장 자신감을 갖는 분야는 중대재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된 지 2년 밖에 되지 않은 만큼 이 분야 검찰 출신 전문가는 손에 꼽힌다. 산업재해 중점검찰청인 울산지검에서 검사장으로 근무하며 중대재해 사건에 관심을 갖고 연구했다.
노 변호사는 현행법에 문제가 많다고 지적했다. 그는 “무거운 처벌조항을 내세워 산업재해 사고를 줄이겠다는 것이 법률의 취지이지만 다양한 조문에서 죄형법정주의 위반, 위임입법한계 위반 등 적용기준이 모호하고 현실에 맞지 않다”며 “산업재해는 다양한 원인으로 발생하는데 오로지 기업의 책임만 부각하고 처벌만능주의를 적용해 나머지 원인에 대한 접근과 해결방법 모색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법안을 개정한다면 법명부터 중대재해처벌법이 아니라 ‘중대재해처벌 및 예방에 관한 법률’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던 초기에는 검찰 내에서도 분석과 해석이 엇갈리기도 했다. 노 변호사는 검사들이 중대재해 사건 처리를 균형적인 시각으로 처리할 수 있게끔 헌법에 부합하는 쪽으로 법을 해석해 나갔다. 그렇게 100여 쪽에 이르는 논문을 집필해 발표하기도 했다.
그간 산업재해 관련한 공안 사건 수사 경력과 중대재해처벌법에 대한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울산에서 발생한 여러 중대재해 사건을 다수 처리했다. 노 변호사는 울산지검에서 처리한 사건 가운데 모 정유회사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꼽았다. 이 사건은 지난해 정유회사 폭발사고로 1명이 숨지고 9명이 경상을 입었으나 대표이사와 최고안전책임자는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것이다.
검찰이 무혐의로 판단한 근거는 이렇다. 외국인인 대표는 최고안전책임자에게 안전 보건 책임을 모두 위임했고, 최고안전책임자 역시 위험성 평가 절차나 매뉴얼 마련 등 중대재해처벌법상 안전보건 확보 의무를 모두 이행해 법을 어긴 부분이 없었다.
이 사건이 무혐의로 마무리되며 검찰에 ‘대기업 면죄부’라는 비판 목소리가 커지기도 했지만 노 변호사는 이 사건의 시사점을 강조했다. 노 변호사는 “이 회사가 중대재해처벌법 취지와 내용에 맞게 예방과 경영 시스템을 잘 갖춰놓은 덕분에 최고경영책임자가 처벌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라며 “‘검찰이 대기업을 봐주냐’는 비판이 나올 수는 있지만 반대로 기업에서는 참고할 만한 사건이다. 이 사건에서 보듯 사전 예방과 전문가들의 법적 자문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 논란과 별개로 검찰은 중대재해 사건에 법을 엄정하게 적용한다고 한다. 노 변호사는 “법 집행기관으로서 검찰은 현행 중대재해처벌법의 입법 취지에 맞게 법을 적용하고 있다”며 “다만 증거부족 등으로 혐의가 인정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무혐의 처분한다”고 말했다.
이 법이 시행된 뒤 대기업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대형 로펌의 법률자문을 받으며 형사 처벌 위험성을 낮추고 있다. 문제는 중소기업이다. 내년부터 근로자 50인 이하 중소기업에도 중대재해처벌법이 적용된다. 전체 사망사고에서 절반에 가까운 수가 중소기업에서 발생하는데, 이들은 아직 법이 요구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상태다. 중소기업이 대기업에 비해 인력과 재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법이 요구하는 시스템을 사전에 갖출 상황이 못 된다고 한다.
노 변호사는 “중소기업에서도 전문 변호사에게 조언을 구해 중대재해처벌법이 요구하는 시스템을 갖춰 형사 처벌 위험성을 크게 낮추길 바란다”며 “도움이 필요한 회사에 예방조치를 위한 법률자문 서비스를 제공하고 기업 형편에 따라 무료 자문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관련 업계에서는 중대재해처벌법의 실효성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가 상당하다. 그러나 노 변호사는 “산업재해를 줄이고자 하는 입법 취지는 존중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중대재해처벌법을 존중하는 태도부터 갖춰야 한다”며 “기업 여건에 맞게 법에서 부여하는 안전보건확보 의무를 시행하도록 노력하고, 처벌을 피하기 위한 형식적인 노력이 아닌 사고 예방을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 변호사는 검사와 변호사를 거치며 법을 다뤄온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경찰로서의 경력도 소중하다고 말했다. 그는 “경찰이 되고난 뒤 수사의 권한은 대부분 검사에 있다는 걸 뒤늦게 알고 검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그때의 경력이 있기에 경찰 조직에 대한 이해도도 높고 주요 간부들과도 소통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보통의 검찰 출신 변호사들과 다른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