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 얽매이지 않는 혁신이 중요하다"…물아주기 카르텔 표적 우려도 상존
“일부 사업의 예산을 80~90% 삭감하겠다는 것은 사실상 연구를 중단하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수탁사업입니다. 연구자들이 연구에 집중하기보다는 인건비를 충당하기 위해 신규 과제 수주에 목을 매야할 판입니다. 연구원이 아니라 영업사원이라고 주고 받았던 자조적인 농담이 현실이 됐습니다.”
이상근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선임연구원은 최근 대전 대전연구개발특구 모처에서 가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이 밝혔다. 이 선임연구원은 “지금까지는 진행 중인 과제에 집중하는 안정적인 분위기가 조성됐는데 갑작스럽게 정부 차원에서 연구개발(R&D) 예산이 삭감되면서 연구원들이 현재 하는 과제의 예산이 내년에도 유지될 수 있을 지 불확실성에 놓이게 됐다”며 “현재 각 기관별로 확정할 수 없게 되면서 불안감이 높아졌고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하다”고 말했다. 예컨대 A라는 연구원이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 5년치 계획을 세웠지만, 꼭지별로 어떤 연구를 하겠다는 계획대로 매년 예산을 나눠 받는데 돈이 줄어들면 꼭지 자체가 날아간다는 의미다.
ETRI의 내년도 사업 예산은 534억 원에서 392억 원으로 올해보다 27% 삭감됐다. 그는 “정부에서 집중적으로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국가전략기술에 포함되지 않은 대부분의 과제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서 “전자통신연의 경우 미디어·콘텐츠 분야가가 타격이 가장 크다”고 설명했다.
출연연의 예산은 정부가 직접 출연하는 출연금과 연구자들이 정부의 연구 과제를 수탁하는 수탁과제(PBS)로 구성된다. 전자통신연의 경우 출연금 비중이 14~15%, 수탁 사업 비중이 80% 이상을 차지한다. ETRI와 같이 수탁사업 의존도가 높은 출연연의 경우 수탁사업에서 인건비를 충당하고 있기 때문에 연구자들이 연구에만 몰두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게 중론이다.
그는 “연구원들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적으로 연구에 매진해야 세계 최고 수준의 성과들이 꽃필 수 있는데 연구비 확보가 불안정해지고 하위 20% 사업을 구조조정을 하게 되면 결국 연구자들은 단기적으로 성과를 낼 수 있는, 실적이 보장된 연구에만 집중하게 될 것이고 연구자로서 본질에서 벗어나 차기 연구를 따오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한계도전 R&D 프로젝트 킥오프’와 같은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이유도 실패 가능성이 크지만, 국가 경쟁력 확보를 위해 필요한 고난도 기술 개발을 과감히 정부에서 지원하겠다는 의도에서다. 이처럼 R&D 분야는 실패에 얽매이지 않는 혁신적인 연구환경 조성이 중요하다. 이 때문에 그동안 정부에서는 미흡평가를 받은 R&D 사업에 대해서도 강제 구조조정을 단행하지 않고 권고 수준에 그쳤다.
그는 “연구원들이 연구실이 아닌 관리기관이나 부처를 전전하면서 공고를 찾고 과제를 따오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더 걱정되는 것은 현 정부에서 예산을 조정해서 정권 말까지 사업을 수행하더라도 정권이 바뀌고 총선이 끝나고 새로운 국회가 구성됐을 때 이 사안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의 문제”라며 “삭감 근거가 명확히 없고 특정 분야에 대해서는 근거 없이 예산을 몰아주고 나머지 분야를 죽여버린 것이야 말로 전형적인 몰아주기 카르텔의 표적이 되는게 아닌가 우려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연구과제중심(PBS)부터 시작해서 연구과제를 운영하는 시스템, 거버넌스 자체를 근본적으로 개편해야 한다”며 “연구사업에 필요한 인건비와 기관운영비 만큼은 100% 보장해주면 안정적인 연구환경이 보장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