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수출부진 타개를 위해 또 소매를 걷어붙였다. 정부는 어제 관계부처 합동으로 열린 비상경제장관회의 겸 수출투자대책회의에서 반도체 경쟁력 강화를 위해 ‘용인 반도체 국가 산업단지’의 예비타당성 조사 면제를 추진키로 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산단 부지 조성을 맡았고, 총사업비가 2000억 원 이상이면서 국가재정·공공기관 부담분이 1000억 원 이상인 만큼 명백한 예타 대상이지만 우회할 길을 터준다는 것이다. 7개 국가첨단전략산업 특화단지 중 첫 번째 사례다.
정부는 또 수출 기업의 자금난 해소와 유동성 확보를 돕기 위해 181조 원 규모의 무역·수출금융을 지원한다. 대형 콘텐츠·미디어 육성을 겨냥해 1조 원 규모의 ‘K-콘텐츠 전략펀드’도 조성한다. 기업 출자와 민간 매칭을 통해 3000억 원 규모의 ‘반도체 생태계 펀드’를 조성, 반도체 중소·중견 기업을 지원한다는 계획도 있다. 국가 경제와 민생을 이끄는 수출이 낡은 짐차처럼 삐걱거리는 현실을 버려두다가는 걷잡을 수 없이 화를 키울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넘실거린다.
추경호 경제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어제 “우리 경제는 대체로 바닥을 다지면서 회복을 시작하는 초입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상저하고’ 프레임은 여전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경제 난기류는 낙관을 허용할 만큼 녹록지 않다. 7월 전산업생산(-0.7%)은 석 달 만에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설비투자(-8.9%)와 소비(-3.2%)는 11년 4개월과 3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줄었다. 근래 들어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는 수출이다. 8월 수출은 지난해 같은 달보다 8.4% 감소했다. 11개월 연속 뒷걸음질이다. 2018년 12월~2020년 1월(14개월간) 이후 최장 감소세다.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미시적 통계 자료에만 담긴 것도 아니다. 한국국제경제학회는 최근 ‘저성장 극복을 위한 성장지향형 기업정책’ 보고서를 내고 우리 경제가 2000년 이후 과거 고도성장을 뒤로하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수준 성장률로 후퇴하면서 선진국과의 격차를 줄이기 어려워졌다고 진단했다. 혁신, 탈규제, 중소기업 노동생산성 제고 등 경제 성장을 획기적으로 가속할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국가적 성공 드라마가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얘기다.
현대경제연구원도 L자형 경기침체 우려를 경고했다. 다수의 해외 투자은행은 한국 경제가 올해에 이어 내년에도 1%대 저성장을 면치 못하리라 전망한다. 다들 표현은 다르지만, 우리 경제가 깊은 수렁에 빠질 수도 있다는 적신호를 보낸 셈이다.
상황이 이런 만큼 국가산단 예타 면제, 금융 지원 등의 카드는 공감이 가고도 남는 비상 처방이다. 그러나 진정 중요한 것은 때를 놓치지 않는 실행이다. 첨단산업 분야의 패권을 둘러싼 경쟁은 군비 경쟁에 못지않게 속도가 중요하다. 미국, 유럽, 일본의 견제에 대응하기도 버거운 판국에 중국의 추격세도 거세다. 한눈을 팔 틈이 없다. 당국이 내민 청사진의 성패도 결국 속도에서 갈린다는 점을 거듭 명심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