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만 있다는 ‘전세’, 사라질 수 있을까? [이슈크래커]

입력 2023-05-19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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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한 오피스텔 분양 관련 사무실 모습. (뉴시스)
▲서울의 한 오피스텔 분양 관련 사무실 모습. (뉴시스)
서민들의 주거 안정을 책임졌던 ‘전세제도’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최근 전세사기 대란 때문인데요.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도 “전세제도는 수명을 다했다”고 언급하면서 ‘전세 폐지론’에 불이 붙였습니다.

원 장관은 16일 취임 1주년 기념 기자간담회를 열고 이같이 밝히면서 전세제도 전반을 손보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는데요.

원 장관은 “지금처럼 갭투자를 통해 (전세금을) 돌려줄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이 이걸 갖고 투자 차익만 노리고, 브로커까지 끼고 조직적 사기 범죄가 판을 치게끔 온 것은 심각한 문제”라며 “이제 제대로 예방할 수 있는 판을 만들어야 하는데 워낙 오랫동안 생겨온 생태계이고 어느 하나 고칠 때 더 큰 문제가 생기면 안 되기 때문에 지금부터 공론화하고 가능한 모든 방안을 검토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주택정책 주무부처 장관이 전세제도 개편을 이처럼 강력하게 언급한 건 사실상 처음입니다. 최근 전세사기 피해가 속출하고, 국토부 역시 해결에 사활을 걸고 있는 만큼 제도 전반을 손보면서 맹점을 보완하겠다는 건데요. 동시에 전세제도 자체를 없애야 한다는 의견에도 힘이 실리고 있습니다. 반면 제도를 없애거나 정부가 이를 인위적으로 통제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반박도 제기됩니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뉴시스)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뉴시스)

산업화와 함께 자리 잡은 전세…서민의 ‘주거 사다리’ 수행

전세는 다른 나라에서는 보기 힘든 한국의 주택 임대차 제도입니다. 목돈이 필요한 집주인, 월세로 빠져나가는 고정비를 줄이고 싶은 세입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생겨났고, 급속한 산업화·도시화가 진행되면서 자리 잡았습니다.

전세의 역사를 따져보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조선총독부의 1910년 ‘관습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월세를 이용한 임대차는 영업용 가옥의 임차 방법으로만 사용했고 주택은 전세 제도가 대부분 활용됐습니다. 단, 가옥을 제외한 일반 토지에 대해서는 전세가 인정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후 전세는 6·25 전쟁 이후 산업화를 거치며 하나의 ‘제도’로 고착됐다고 합니다.

전세는 공적인 주택금융이 존재하지 않았을 때, 즉 금융 시스템이 제대로 동작하기 전부터 자금 융통 수단으로 활용됐습니다. 주택을 담보로 하는 사실상 사금융 역할이었죠.

임대인은 집을 살 때 부족한 자금을 전세보증금으로 충당할 수 있습니다. 주택담보대출은 대출 한도나 이자가 있지만, 전세는 일종의 무이자 대출입니다. 임차인 입장에서도 전세자금대출을 받아 월 이자를 내는 게 월세보다 저렴합니다. 물론 금리가 높다면 월세를 내는 게 더 유리할 수 있지만, 전세대출은 관련 상품이 많고 공적 기관의 보증으로 다른 대출에 비해 이자가 적은 편이죠.

또 전세는 개인 간 금전거래라 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DSR) 규제가 적용되지 않고, 보증회사의 보증서를 담보로 이뤄지는 은행 대출은 HUG, SGI, 한국주택금융공사 등 보증기관이 최대 100%까지 보증합니다.

당장 가진 돈이 많지 않더라도 부족한 자금을 대출로 충당할 수 있는 셈이라, 전세는 ‘내 집 마련’의 중간 단계로 활용돼 왔습니다. 사회초년생 때는 월세살이를 하다가, 돈을 모아 전세로 전환, 목돈을 모으면서 자가를 구매하는 방식이죠. 무주택 서민·중산층의 ‘주거 사다리’ 역할을 해왔다는 평입니다.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깡통전세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눈물을 흘리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11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린 전세사기 깡통전세 특별법 제정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가 눈물을 흘리며 발언하고 있다. (뉴시스)
무자본 갭투자 성행하기도…전세사기에 취약한 구조 지적

그러나 전세가 갭투자 수단으로 이용되면서 각종 부작용이 발생했습니다. 자본력이 없는 이들이 전셋값을 발판으로 갭투자에 뛰어들었다가 부동산 하락기가 닥치자 기존 임차인에게 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는 경우가 속속 등장한 겁니다.

또 전세대출과 보증도 수월한 탓에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속출했습니다. 임차인이 낸 임대차보증금으로 주택을 매입하는 ‘무자본 갭투자’, 시세를 부풀려 실거래가보다 전세보증금이 높은 ‘깡통전세’ 등이 확산한 겁니다. 돈 한 푼 안 들이고 전세 낀 집을 수십 채씩 투자하는 이들이 나왔죠. 수도권에서 전세사기를 벌이다 사망한 ‘빌라왕’ 김 모 씨 역시 전세 대출 시세 대비 보증 비율이 높고 가치평가가 어려워 시세를 조종하기 쉬운 주택 1139채를 소유한 바 있습니다.

전세사기 문제가 잇따라 불거지면서 ‘전세대출’에 대한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전세대출은 2008년 ‘서민 주거 안정’ 명목으로 시행됐지만, 최근 불거진 전세사기 사례를 살펴보면 빠짐없이 등장하는 요소이기도 합니다. 전세대출이 주거에 대한 부담을 줄인 건 사실이나, 낮은 금리를 이용한 갭투자는 집값 거품으로, 더 나아가 전세사기를 낳았다는 지적입니다.

전세 폐지론도 이 맥락에서 나옵니다. 전세사기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된 참에 전세제도 자체를 퇴출해야 한다는 건데요. 대신 주택 구입과 월세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습니다.

▲간담회하는 원희룡 국가교통부 장관. (사진제공=국토교통부)
▲간담회하는 원희룡 국가교통부 장관. (사진제공=국토교통부)
전세 폐지? 순기능 적지 않은데…제도 보완이 우선

그간 전셋값이 급등하면서 대란이 예고될 때마다 전세 폐지론은 어김없이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전셋값이 오르면 집값도 오르고 갭투자가 횡행하다가, 집값이 떨어지면 깡통전세, 역전세가 발생하는 악순환이 이어졌기 때문이죠. 그러나 전세제도가 자리 잡은 지 50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이미 작동 중이고 수요가 많은 제도를 단순히 부작용 때문에 없애자는 건 ‘무리’라는 게 중론입니다.

실제로 전세 거주자는 2020년 기준 약 325만2000가구, 전 국민의 15.5%에 달합니다. 전세제도를 없애버리면 모든 임대인은 보증금을 반납해야 하는데, 반환금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 급락 등 시장 전반에 혼란이 찾아올 수 있습니다. 또 전세가 없어지면 세입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주거 형태는 월세뿐입니다. 월세 세입자들이 몰리면 전세 제도가 없는 선진국처럼 도심 지역 월세는 수백만 원 이상으로 굳어질 수 있고, 무주택자의 부담도 크게 늘어납니다. 월급의 상당 부분이 주거비로 나가는 현상이 보편화되면서 내 집 마련의 꿈은 더 멀어지게 되죠.

이 같은 이유로 시장에서는 제도 개선에는 동의하면서도, 순기능이 적지 않은 제도 자체를 폐지하는 것에는 우려를 표하는 상황입니다. 자칫 ‘빈대 잡으려고 초가삼간 태운다’는 말처럼, 미봉책으로 더 큰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는 겁니다.

폐지 대신 제도에 대한 보완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지목되는데요. 우선 전세대출을 축소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은행권 전세자금대출 잔액은 2018년 64조 원에서 2022년 171조9000억 원으로, 4년 만에 3배 가까이 늘어났습니다. 무분별하게 확대된 전세대출은 전세사기와 깡통전세를 불러일으킬 수 있어, 전세대출에 대한 규제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입니다.

박춘성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달 전세제도 관련 보고서에서 “전세 계약의 투명성을 유지하고, 전세 계약으로 가계부채가 과도하게 누적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라며 “현재 100%에 가까운 전세자금대출 보증 비율을 점진적으로 낮춰 보증부월세 등으로 유도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또 연립·다세대 주택 등 빌라 시세 투명화로 신축 빌라의 공정가액 설정부터 전셋값에 대한 기준과 통계를 마련해야 할 필요도 있습니다. 일반인도 빌라의 시세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건데요. 실제 신축 빌라는 감정평가 기준이 명확하지 않아서 시세 조종이 쉽고, 아파트에 비해 전세가율이 높아 집값이 조금만 떨어지더라도 보증금 반환이 어려워 전세사기에 특히 취약한 구조입니다. 아파트는 해당 단지나 주변 단지 거래를 통해 시세가 형성되고 이를 파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빌라는 그렇지 않아 실거래가를 제공하는 시스템의 필요성도 대두됩니다.

이에 정부 임대차 3법을 대폭 수정할 것으로 보입니다. 원 장관은 기자간담회에서 “큰 틀에서 임대차 3법 전체를 개정해야 한다”며 “보증금이라는 제도를 어떻게 할 것인가, 임대·매매 가격에 대한 투명한 공개와 관리 시스템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 등이 맞물려 있다”고 했습니다.

임대차 3법은 2020년 7월 국회를 통과한 주택임대차보호법 개정안으로, 2년 더 전세 계약을 갱신할 수 있는 ‘계약갱신청구권제’, 갱신 시 전월세 임대료를 인상 상한을 5% 이내로 제한하는 ‘전월세 상한제’, 주택 임대차 계약 시 보증금, 차임 등 계약사항 등을 의무적으로 신고하도록 한 ‘전월세 신고제’를 말하는데요. 당초 임차인의 안정적인 주거 보장을 위해 도입됐지만, 실제 부동산 시장에서는 전셋값 상승이라는 역효과를 불렀습니다. 최대 4년까지 집값을 올리지 못해, 집주인들이 보증금을 미리 올려서 물건을 내놨기 때문이죠. 이때 전국 전셋값은 1.3% 상승했지만, 개정 직후인 8월부터 1년간 전셋값은 11.2% 급등했습니다. 집값이 떨어지면서 이는 역전세 대란으로까지 이어졌죠.

이미 국토부는 주택임대차법 개선을 위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입니다. 내년 용역 결과가 나오면, 이를 반영해 임대차 제도 전반을 개선할 예정입니다.

에스크로(제3기관에 전세보증금 예치) 제도 도입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는데요. 이는 임대차 3법처럼 오히려 역효과를 부를 수 있습니다. 전세 거래 시 금융회사에 전세보증금을 맡겨 안전 결제를 보장하면 임대인 보호엔 도움이 되지만, 임대인 입장에서는 목돈이 묶이는 셈입니다. 그럼 전세 매물이 자취를 감추고, 정부의 목적대로 전세 비중이 줄어들더라도 임대인들이 예치금만큼 보증금을 올려받으면 임차인의 주거 부담이 늘어날 수 있어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입니다.

전세사기 문제가 연달아 불거지면서 정부도 골머리를 앓는 상황이지만, 인위적으로 제도를 손봤다가 더 큰 역효과를 낳을 수 있습니다. 주거 문제는 생존권과도 직결된 만큼, 한시적 문제 해결이 아닌 실효적인 제도 개선과 보완이 절실한 시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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