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엔화 가치가 가파르게 하락하고 있다. 무제한으로 돈을 찍어내 엔화 약세를 유도함으로써 수출경쟁력을 높이고 경기를 부양한다는 ‘아베노믹스’의 여파다.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3년부터 통화·재정 완화에 드라이브를 걸었고, 지금도 마찬가지 기조다. 하지만 최근의 글로벌 긴축과 엇나가는 데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공급망 붕괴로 인한 수입물가 급등으로 이어져 일본 경제 타격이 커지고 있다.
엔·달러 환율은 22일 도쿄외환시장에서 128.13~14엔으로 올랐다. 2002년 4월 이후 20년 만에 가장 높고, 올 들어 12%나 뛰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빅 스텝’ 등 기준금리 대폭 인상 예고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계속 마이너스 금리를 고집한다.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는 이날 뉴욕 컬럼비아대 강연에서 “강력한 금융완화를 끈기 있게 지속하겠다”고 밝혔다.
글로벌 투자은행(IB)들은 엔·달러 환율이 심리적 저항선인 130엔을 넘어 곧 135엔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일본 내에서 ‘나쁜 엔저(円低)’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엔저에 힘입은 수출 증대와 경기 회복, 임금 상승 등의 선순환 경로가 먹히지 않고, 오히려 수입물가 급등과 구매력 감소를 불러와 일본 경제에 타격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당장 일본의 2021년 회계연도(2021년 4월∼2022년 3월) 무역수지는 5조3749억 엔 적자를 기록했다. 2년 만의 적자 전환이다. 올해 3월 무역수지도 4124억 엔 적자로 8개월 연속 마이너스다. 그럼에도 ‘나쁜 엔저’를 막기 위해 금리를 올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의 작년 말 국채잔액은 1000조 엔을 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채무비율은 250% 이상이다. 금리를 올리면 나랏빚의 원리금 상환 부담이 급증해 재정 파탄 우려가 커진다.
한국으로서도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 원화 또한 세계 경제 불확실성, 미국 금리인상 등으로 가치가 계속 떨어지고 있다. 22일 서울외환시장의 원·달러 환율은 1239.1원으로 마감했고, 장중 1245.4원까지 치솟았다. 상반기 중 1250~1270원 수준까지 상승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수출 증대 효과는 제한적이고 수입물가 부담만 커진다. 수출이 늘고 있음에도 4월 들어 20일까지 무역적자만 52억 달러에 이른다. 연간 무역수지 적자 가능성이 높고, 이 경우 2008년 이후 14년 만이다. 막대한 국가채무에도 불구하고 기축통화 지위를 갖는 일본은 재정으로 대응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럴 힘이 없다. 지난 5년 급증한 재정적자로 국가채무가 올해 1000조 원, GDP 대비 채무비율 50%를 넘는다. 한국 경제도 일본과 비슷한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비상한 상황에서 재정건전성에 대한 경각심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