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장실은 배우들이 무대에 오르기 전 옷을 갈아입고, 외모를 정돈하거나 대본을 외우는 공간으로 인식된다. 무대 뒤편에 놓인 이 공간에서 오세혁 연출은 '역사'를 찾았다.
연극 '분장실'은 안톤 체홉의 '갈매기'가 공연 중인 극장의 분장실을 배경으로 한다. 일본 현대 극작가 시미즈 쿠니오의 작품이 원작이다. 1977년 초연 이후 일본 내에서 가장 많이 공연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오 연출은 제작사 T2N미디어의 제안을 받고 일본에서 다양한 형태로 공연된 '분장실'을 한국화하는 역할을 맡게 됐다. 한국 젊은 남자 배우들이 가진 저마다의 고민을 제대로 보여주자는 마음이 '분장실 Ver2'에 그대로 담겼다. 특히 오 연출이 A, B, C, D로 지칭되는 네 명의 남자 배우에게 요구한 건 단 한 가지였다. '소박한 진심'이다.
최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인근에서 만난 오 연출은 "분장실을 거쳐 무대로 나간다는 건 배우에게 '재능' 외에도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며 "한발 더 나아가는 배우들의 마음가짐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밝혔다.
다음은 오 연출과 일문일답
- '분장실 Ver2'는 '분장실'의 스핀오프 개념인데.
"'분장실'은 일본에서도 굉장히 다양한 버전이 있었다. 여성 배우 중심으로 시작됐지만, 남성 배우가 출연하거나 섞여 있는 경우도 많았다. 또 배우의 종류도 다양해서 가부키 배우들의 이야기가 나오거나 영화배우가 중심인 경우도 있었다고 하더라. 시대가 흐르면서 배우들의 존재가 달라지는데 분장실은 그대로인 것에 중점을 두고, 그 외의 것들을 열어두신 것 같다. 저도 열린 상황에서 참여하게 됐다."
- 앞서 공연된 여성 배우 버전의 '분장실'하고 완전히 다르다.
"저는 극단 출신이지만, 제가 최근에 만난 배우들은 극단 출신인 경우가 많지 않았다. 이들 배우는 제작사 공연 위주로 출연하는 경우가 많다. 그럼 혼자 헤쳐 나가야 하는 것들이 많았을 것이다. 많이 외로울 거고…그래서 '분장실'을 하게 되면 이 배우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단 생각을 해왔다. 그런 측면으로 방향을 잡게 된 것이다. 핵심은 원작 구성을 그대로 따라가되 장면마다 확장해야 할 것들이나, 우리 현실에 맞는 것들은 과감하게 조정했다."
- C는 '드라마 대본'을 들고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기도 한다.
"맞다. 요즘 배우 중 그런 고민을 하는 친구가 많다. 대부분 무대에 서는 걸 좋아하지만, 자신이 갈 길에 대한 고민을 계속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떤 장르까지 연기할 수 있고, 어디까지 배우로서 빛날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함도 있을 것이다. 빨리 확신을 얻고 싶은 마음에 다양한 장르, 매체에 도전하는데 무대처럼 하나의 긴 호흡을 보여주기도 쉽지 않다. 아무리 자기가 좋아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도 처한 현실이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은 게 현실이다. 마침 이번에 참여하는 홍승안, 김바다 배우도 이런 고민을 했던 배우들이다. 무대를 좋아하는 이 배우들에게서 영감을 받아 만든 캐릭터가 C이다."
- 평소 배우들과 토론을 많이 하는 연출가로도 잘 알려져 있다.
"원작 구성을 기본으로 현실에 맞게 각색했더니 제작사에서 배우들을 캐스팅해줬다. 이후 이 배우들에게 좀 더 맞춰야겠다고 생각해서 반영하게 됐다. 김준영 배우는 이번에 연극이 처음이다. 도지한 배우는 어린 시절 매체에서 활동하다가 제대한 이후 다시 연기하게 됐다. 그런 마음들도 D 캐릭터에 반영됐다. 두렵지만 잘해내고 싶은 그들의 마음을 담았다. 배우가 빛나려면 그들이 가장 잘하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가 가진 개성과 성격을 자연스럽게 드러날 수 있게 도와주고 싶다. 얘기를 많이 나누고 부딪히면서 자연스러움을 쌓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다. 재밌기로 유명한 정원영 배우는 진지할 때 가장 멋있어서 독백할 때 그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 대극장에서 활동하는 박민성 배우가 가진 인간미가 무대에서도 보이길 바랐다. 유승현 배우는 잘 봐주고 잘 들어주는 배우이기 때문에 평소의 모습과 캐릭터가 잘 맞아 떨어졌다."
- 배우들에게 특별히 주문한 것들이 있는지.
"이번 연극의 콘셉트는 '소박한 진심'이다. 이를 배우들에게 강조했다. 누가 말하면 잘 들어주고 잘 봐달라고 했다. 열심히 말하는 걸 열심히 봐줘야 열심히 관객들이 손뼉을 쳐줄 거라고. 이 공연의 핵심 연기법이다."
- '분장실' 연출로 나서게 된 이유도 궁금하다.
"크고 작은 이유가 있다. 예전에 '분장실'에 관한 칼럼을 쓴 적이 있다. 분장실은 사람이 배우로 변하는 공간인데, 배우들은 각자의 사연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공연 중 부모님 중 한 분이 돌아가셨는데 공연이 끝난 후에서야 울었던 배우, 가족이 공연을 보러 왔는데 역할이 너무나도 작은 배우,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분장실 안에서 30분 넘게 고생하는 배우들을 봤다. 이것들을 썼더니 제작사 대표님이 함께 하자고 제안을 했다. 몇 년 전 일본 극단이 한국에 와서 '분장실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제가 속한 극단이 분장실의 또 다른 버전인 '분장실 청소'를 공연한 적이 있었다. 올해 12월에 일본에 있는 배우들이 제 '분장실 청소' 대본으로 온라인 낭독회를 한다고 했다. 운명인 것 같다."
- 극단 '걸판' 소속으로 무대에 선 경험도 '분장실' 연출에 도움이 됐겠다.
"당시 극단 인원이 적어서 저도 배우로 참여했다. 주인공은 아니지만. 어느 순간 분장실에 있는데 공연 30분 전부터 심장이 터질 거 같았다. 매일 무대에 나가면 같은 이야기를 같은 정서와 감정이 흐르도록 해야 하는데 그것 자체가 너무나도 긴장됐다. 견디기 힘들었다. 저는 글 쓰고 연출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대신 배우들이 긴장하지 않게 도와주고 그들이 빛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렇게 분장실을 나왔다."
- 오세혁의 '분장실'의 장점이자 특징은.
"원작에선 쌓여가는 시간에 대해 말한다. 준비하는 시간인 것이다. 저는 왜 원작을 쓴 선생님이 다른 시기에 활동했던 A, B, C, D가 분장실에 모인 걸 썼을지 생각했다. 어떤 배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채 분장실에서 끝이 났다. 시대와 환경이 힘들어서 시간이 쌓이지도 않은 채 분장실에서 머물게 된 것이다. A가 쌓은 이 시간 뒤에 B가 나타나고, C, D가 이어가요. A가 피우지 못한 꽃을 B는 피우려 했지만 선택지 안에서 고민하다 끝난다. C와 D는 요즘 배우들을 보여주고. A부터 D까지 100년의 세월이 흐른다. 이 시간이 한자리에 모이면 의미가 있을 거로 생각했다. 문득 내가 분장실에 혼자 있는데, 그 이전에 거쳐 갔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보고 있을 거란 생각도 했다. C, D가 뭘 할 때마다 A와 B가 박수치고 응원해주는 것도 중요한 포인트다.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잘하고 있다'고 응원해주는 것이다. 시간은 혼자 쌓는 것도 있지만, 여러 사람의 시간이 쌓여 오늘날의 극장까지 올 수 있었다는 걸 저희 버전에서 말하고 싶었다."
- 오세혁에게 분장실 같은 공간은.
"연습실에 있을 때 마음이 가장 편하다. 연출가이기 때문에 공연 속 세상을 만들지만, 잠시 멈추면 다시 일상이다. 연습실은 이 양쪽 세상을 오갈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두 공간의 경계가 희미하게 열려 있다. 또 연습을 잠시 멈췄을 땐 배우들과 인생 얘기를 많이 나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에너지가 생기기도 한다. 물론 연습하다가 하루만 쉬고 싶다고 생각 들기도 하지만, 연습실에 있을 때가 제일 좋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