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추억이 담긴 거리가 사라지고 있다. 오랜 기간 한자리에 머물며 골목을 든든히 지킨 ‘특화 거리’가 코로나19와 비대면 전환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그리움과 행복이 담긴 장소가 활력을 잃은 지 오래다. 사람들의 외면과 무관심 속에 거리는 적막감이 감돈다. 사라져가는 골목 속 이야기를 조명한다.
“매출은 일 년 새 반 토막이 났네요. 선거철 특수도 옛말입니다.”
이슬비가 떨어지던 16일 찾은 ‘인현동 인쇄골목’은 적막했다. 요란한 인쇄기 소음도, 인쇄골목의 트레이드 마크인 ‘삼발이(삼륜 오토바이)’ 엔진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인현동 인쇄골목은 서울 중심에 있는 인쇄 특화 거리다. 지하철 3호선 을지로3가역부터 충무로역 사이에는 크고 작은 인쇄소가 와글와글 몰려 있다. 일반 인쇄부터 포스터, 명함이나 봉투, 청첩장, 다이어리, 달력 등 종이와 관련된 제품은 모두 만들 수 있다. 종이에 금박을 넣거나, 큰 간판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다.
1980년대부터 인쇄소가 몰려들기 시작한 인현동 인쇄골목에는 오랜 시간 터를 잡고 인쇄소를 운영해 온 이들이 많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들이지만, 하나같이 지금을 “가장 힘들다”고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쇄소를 직접 찾는 사람들이 없다는 것이다. 인쇄소마다 ‘마스크를 꼭 써주세요’라고 써 붙인 가운데, 어렵고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지친다며 손을 내젓는 사장님도 많았다.
일반 인쇄소를 운영하는 A 씨(53)는 바쁘게 인쇄물을 포장하고 있었다. 인쇄소를 운영한 지 수십 년이라 정확한 날짜도 몰랐다. 묵직한 종이 꾸러미를 끈으로 묶는 손이 재빨랐다.
A 씨의 인쇄소도 코로나19 확산으로 매출 감소를 겪었다. 그는 “매출이 정말 반 토막 났다”며 “코로나19 때문이지 않겠나”라고 되물었다. 대면 행사가 줄어들면서 팸플릿이나 자료집, 명함, 봉투 등 인쇄가 필요한 물품 수요도 줄었기 때문이다.
김 모(73) 씨가 운영하는 인쇄소에선 인쇄기 대신 TV 소리만 울렸다. 일반 인쇄부터 봉투 제작까지 ‘토털’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간판이 머쓱했다. 찾는 사람이 없어 매출도 제로(0)다.
김 씨는 “매출이 아예 없다”며 “지난해부터 주문이 아예 없으니 저렇게 기계를 놀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김 씨는 빈 도시락통을 가리키며 “오죽하면 점심을 집에서 싸 와서 먹겠나”라고 되물었다. 점심값이라도 아껴보려 했단 뜻이다.
그는 “그렇다고 가게 문을 닫을 수도 없고 답답할 노릇”이라고 푸념했다. 4차례 지급된 재난지원금도 한 번밖에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 씨는 “한 번밖에 주지 않더라”며 “왜인지도 모른다. 문을 닫을 수도 없고…”라며 인쇄소 안을 둘러봤다.
선거철 반짝 특수도 옛말이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얼마 전에 끝났지 않냐고 묻자 김 씨는 “요새는 당마다 알아서 선거 공보물을 인쇄하기 때문에 바쁠 일도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같은 골목에서 마주친 B 씨(32)도 “요새 누가 선거철이라고 여길 오겠나”라며 “10년도 더 전 이야기”라고 말했다. 그는 인쇄소에서 일한 지 수년째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