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들이 얼마나 배당 여력을 가지고 있는 알 수 있는 지표가 잉여현금흐름이다. 잉여현금흐름은 기업이 사업으로 벌어들인 영업활동현금에서 설비투자액 등의 투자금액을 뺀 것이다. 배당금과 자사주 매입, 기업의 인수·합병 등 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
국내 대기업 상장사의 배당여력 지표인 잉여현금흐름(FCF)이 1년 새 17조 원 이상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국내 500대 기업 상장사 259개 사의 올 3분기 개별기준 누적 잉여현금흐름을 조사한 결과, 총 28조1454억 원으로 집계됐다. 지난해 같은 기간 10조6967억 원에서 163.1%(17조4486억 원) 증가한 수치다. 조사 대상 기업의 절반이 넘는 143개 사(55.2%)가 지난해에 비해 잉여현금흐름이 늘었다.
대기업들은 코로나19로 인한 경영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현금 확보에 나섰고, 현금성자산보다 금융기관 예치금 등 단기금융상품으로 대응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현금성자산은 2조7006억 원이었지만 단기금융상품이 25조7060억 원으로, 총 28조4066억 원을 기록했다. 포스코 역시 현금성자산 2조9869억 원에 단기금융상품 8조4529억 원 등 11조4398억 원으로 10조 원을 넘었다. 기아차와 현대차도 단기금융상품이 각각 6조2625억 원, 4조3329억 원으로 유동자금은 7조5244억 원, 4조8601억 원에 달했다.
대기업의 보유 현금이 늘면서 배당 증가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국내 기업들이 유독 배당성향(이익중 배당금 비율)이 낮았던 것을 감안하면, 향후 배당증가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블룸버그와 전문가들에 따르면 우리나라 기업들의 평균 배당성향은 과거 10년 평균 23% 수준에 머물렀다가 지난해 33%까지 상승했지만, 영국 55%와 미국 40~49% 수준보다 낮은 수준이다. 중국마저도 35%이고, 대부분의 나라가 40% 정도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김영익 서강대 경제대학원 교수는 “우니나라의 배당성향이 그동안 너무 낮았던 것을 감안하면 정상화되는 과정”이라며 “한국도 배당을 늘리면서 주가가 도약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라고 말했다.
잉여현금흐름만 놓고 보면 기업들의 전반적인 배당 여력은 늘었지만, 속내는 복잡하다. 코로나19 직격탄으로 항공·여행·호텔·관광 등의 기업경영환경이 악화된 것을 지켜본 기업들은 사업위기를 유발하는 외부요인에 대한 준비가 절실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위기감에 커짐에 따라 기업들 대부분은 아직 내년 경제 불확실성에 대한 준비가 덜 된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가 이달 6일 매출액 기준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21년 기업 경영환경 전망 긴급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기업(151개사)의 71.5%가 내년도 경영계획의 ‘초안만 수립(50.3%)’했거나 ‘초안도 수립하지 못했다(21.2%)’고 답했다. 10곳 중 7곳이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인해 2021년 경영계획 수립을 마치지 못한 셈이다.
내년도 경영계획 수립 시 기업들의 애로사항으로는 ‘코로나19 재확산으로 인한 불확실성(42.9%)’이 가장 높게 조사됐다.
이어 △환율·금리 변동 등 금융 리스크(19.3%) △고용·최저임금 등 노동정책 부담(14.5%) △미중 갈등 지속 등 무역 불확실성(9.8%) △정치적 갈등 및 기업 규제 부담(8.1%) 등이 꼽혔다.
유환익 전경련 기업정책실장은 “코로나19 재확산 등 대내·외 불확실성으로 경영환경 전망이 어렵고, 세계 경제의 회복세 둔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며 “기업들의 성장 동력이 약화되지 않도록 애로사항을 적극적으로 파악하고 정책적으로 지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민연금공단은 배당확대를 통한 주주환원 정책을 주도하는 선봉장이다. 국민연금은 올 초 ‘5% 룰’이 완화된 이후 처음으로 기업 56곳에 대한 주식 보유 목적을 ‘단순 투자’에서 배당이나 지배구조 개선에 관여할 수 있는 ‘일반 투자’로 변경했다. 이들 기업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현대차, 대한항공 등 주요 기업도 포함됐다. 국민연금이 경영 투명성 감시를 무기로 배당을 높여 투자수익을 높이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국민연금의 배당 확대 요구와 소액 주주들의 인식 변화도 배당에 대한 관심을 놓이고 있다. 정재규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선임연구위원은 “개인투자자들이라고 하면 단기매매 차익만을 노리면서, 회사 가치에 관심이 없다고 이해가 됐었지만 최근 다른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며 “소액주주들이 배당이나 자사주, 유휴 자산에 대한 처분이나 활용 등 다양한 의견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배당을 확대하라는 주주들의 요구가 해마다 확산하면서, 경영진은 ‘미래 대응’과 ‘주주 달래기’ 두 가지를 놓고 고민이 커지고 있다.
코스피 대형주 중심으로 늘어난 잉여현금흐름이 기업 전체의 실적 상승으로 비칠 수 있는 것도 부담이다. 실제로 전체 기업 대상으로 한 배당을 살펴보면 상황이 좋지만은 않다.
한국예탁결제원에 따르면 지난해 주주에게 현금배당(분기·중간배당 제외)을 지급한 12월 결산 코스피·코스닥 상장사는 총 1094곳이며, 배당금은 22조5527억 원으로 집계됐다. 총 배당금은 역대 최대를 기록했던 2018년(22조9781억 원)에 비해 1.9% 줄어든 것이다. 배당금이 전년 대비 감소한 것은 2012년(-0.8%) 이후 7년 만이다.
올해 대기업의 잉여현금흐름이 크게 증가했지만, 대부분의 기업 환경이 좋아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게다가 정부의 산업 체질 개선을 위한 기업 구조조정도 속도를 내면서 기업의 불안감은 배가 되고 있다.
윤석렬 금융감독원장은 선제적 구조조정 의지를 피력하며 “코로나19 장기화에 따른 언택트(비대면) 확산으로 사업구조 전반이 크게 변화하면서 기업들의 사업구조 전환 및 재편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며 “현시점이야말로 효과적 기업구조조정 전략을 수립할 적기”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