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 키(key)는 걸핏하면 먹통이고, 전자장비 오작동은 이제 포기했어요. 주행하다 시동 꺼지고, 혼자 멈춰버리기도 합니다. 매달 차 값으로 170만 원씩 내고 있는데….”
부산 수영구에 사는 아우디 Q7 오너 김미진(36) 씨는 오늘도 서비스센터에 맡긴 차를 기다리고 있다. 4월 말 신차를 구입하고 채 2개월이 안 되는 기간동안 서비스센터 입고만 5차례, 입고 기간도 벌써 보름이 넘었다.
◇신차 결함 때 '교환 및 환불' 명시한 레몬법=레몬법은 신차 결함으로 인한 소비자 피해를 구제하기 위한 '자동차 관리법' 개정안이다.
신차를 인도받은 지 1년(또는 주행거리 2만km 이내) 이내에 중대 하자가 2회, 일반 하자가 4회 발생한 차량이 대상이다. 이들이 수리 뒤 동일 하자가 재발생하면 중재를 거쳐 '교환 또는 환불'을 명령하는 법적 제도다.
국토교통부는 교통안전공단에 ‘자동차안전ㆍ하자 심의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곳에서 전반적인 하자를 판별하고 중재를 거쳐 교환이나 환불을 판정한다.
중재부는 △법조계 △자동차 전문가 △소비자 보호 분야 전문가 등 3인으로 구성한다.
총 30명으로 구성된 심의단 중에서 소비자가 1명, 자동차 회사가 1명을 선정한다. 이렇게 선정된 2명의 전문가가 상호 논의를 통해 나머지 1인을 선정한다. 이렇게 3명의 중재부가 구성된다.
중재위는 사실상 법원 판단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지닌다.
◇신차 소비자 보호를 위한 명목으로 출발= 우리나라 레몬법의 시작은 4년 전이다.
자동차 2000만 대 시대를 앞둔 2016년 8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심재철 당시 새누리당 의원이 입법 발의했다. 본격적인 시행은 2019년 1월부터다.
시작은 1975년 미국이다. 신차에 결함이 있을 때 제조사가 소비자에게 교환, 환불, 보상 등을 하도록 규정한 미국의 소비자 보호법이다.
오렌지인 줄 알고 구입했더니 정작 속은 신맛 가득한 레몬일 경우를 빗대어 부른 이름이다. 정식 명칭은 ‘매그너슨-모스 보증법(Magnuson-Moss Warranty Act)’이다.
◇1년 반 사이 170건 종결=본지가 국토교통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확보한 ‘교환 및 환불 중재처리 현황’을 보면 지난해 1월 관련법이 시행된 이후 교환 또는 환불 판정은 0건이었다.
0건이라고 무턱대고 실효성을 따지기 전에 배경을 먼저 살펴야 한다.
6월 말 기준 총 170건이 종결됐다. 그리고 178건이 접수 또는 중재 진행 중이다.
종결된 170건 가운데 절반 이상은 요건 미충족이다. 단순 품질 문제도 해당이 없다. 예컨대 △성능 부족 △외부 소음 △간헐적 진동처럼 기준이 모호하거나 결함으로 판명되지 못한 경우다.
일련의 과정을 거쳐 중재부 판정에 따라 교환 또는 환불된 사례는 0건이다.
◇교환ㆍ환불 판정은 0건의 진짜 이유는?=중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61건이 취하됐는데 이 중 교환(9건)과 환불(12건)이 존재한다.
법적 효력을 지닌 중재부가 교환 또는 환불을 판정하기 전, 제조사 또는 판매사가 교환과 환불을 결정한 사례다. 이를 조건으로 소비자와 중재 취하를 합의하는 셈이다.
국토부 산하 안전하자 심의위원회 소속 한두희 변호사는 “레몬법 적용에 따른 교환 또는 환불 판정이 0건이라는 결과만 놓고 관련법의 실효성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며 “중재부가 심의를 진행 중인 과정에서 교환이나 환불을 결정하면 소비자가 중재를 취하하는 경우”고 말했다.
교환이나 환불 판정은 0건이지만 이 과정을 진행하는 도중에 교환이나 환불이 결정되는 사례다.
자동차 리콜과 비슷하다.
제작사 또는 판매사가 국토교통부의 최종 리콜 명령 직전에 결함을 인정하면 이는 ‘자발적 리콜’이 된다. 수많은 ‘자발적 리콜’ 이 100% 자발적은 아니라는 의미다.
마찬가지로 레몬법에 따라 교환 및 환불이 최종 단계에서 결정되는 사례는 없었지만 진행 과정에서 제조사 또는 판매사가 결함을 인정하고 교환 또는 환불하는 셈이다.
◇법인차는 레몬법 대상에서 제외=레몬법에 대한 소비자 인식이 개선되면서 지난해 80건 안팎을 해결했지만, 올해는 상반기에만 이 규모를 넘어섰다.
문제는 레몬법의 사각지대가 예상 밖에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올 상반기 기준, 전체 수입차 판매의 약 37%가 법인 판매다. 환급과 절세 혜택을 이유로 많은 자영업자가 법인 명의로 신차를 사기도 한다. 국산차도 전체 판매의 두 자릿수 이상이 법인차다.
이들 법인차는 교환 및 환불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레몬법상 교환 및 환불을 신청할 수 있는 자격은 '자동차 소유주'로 국한된다. 법인차 소유주는 법인이지 실제 운전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리스사 법인명의 리스 차량 또는 최근 인기를 누리고 있는 신차 장기 렌터카 고객도 레몬법에 따른 교환ㆍ환불 신청자격이 없다. 그저 리스 및 렌탈 계약자에 불과하다.
렌터카의 경우 2008년 기준 20만 대에 머물렀으나 2019년에는 190만 대를 넘어섰다. 우리나라 전체 자동차가 2300만 대 수준임을 고려하면 적잖은 비율이다.
장기 렌터카의 경우 반복된 결함과 고장 탓에 계약을 해지할 경우 운전자(계약자)가 막대한 위약금을 물기도 한다.
앞서 언급한 아우디 Q7 오너 김 씨는 반복된 결함 탓에 계약해지를 요청했더니 아우디 측은 위약금으로 약 2000만 원을 요구했다.
◇레몬법상 '자동차 소유주'에 대한 개정안 절실=관련법 개정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여기에서 나온다.
리스나 장기 렌터카 회사가 소유주를 위해 적극적으로 교환 및 환불을 요청해주면 좋은데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 마디로 이들은 '한 가족' 이기 때문이다.
현대차 오너 가운데 상당부분이 현대캐피탈 오토리스를 이용한다. 앞서 언급한 아우디 Q7 오너 역시 ‘아우디파이넨스’의 장기 렌터카 프로그램을 이용해 신차를 구매했다.
자회사인 할부금융사가 모기업에 교환 및 환불을 요청하기에는 큰 부담이 따른다.
리스나 장기 렌터카 회사가 신차 결함에 따른 '교환ㆍ환불' 요청 권한을 계약자에게 위임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여신 법에 저촉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국토부 자동차정책과 위은환 서기관은 “단순하게 자동차 관리법의 개정만으로 관련법을 보완하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라며 “리스 또는 장기렌터카 법인에서 일부 권한을 계약자에게 위임하는 것 역시 ‘여신법’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등 전반적인 보완이 필요한 사항”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