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부가 20대 국회에서 폐기된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안을 다시 국회에 제출하기로 결정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로 유럽연합(EU)과의 무역 마찰 우려를 내세웠다.
ILO 핵심 협약 중 노조 설립 및 활동 확대 등을 핵심으로 하는 결사의 자유에 관한 제87호, 단결권에 관한 제98호, 강제노동 금지에 관한 제29호의 비준이 이뤄지지 못할 경우 EU가 우리나라에 무역적 조치를 취하는 등 경제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우리 수출에 엎친데 덮친격이 될 수 있는 문제다.
12일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EU는 작년 7월 한국이 한·EU 자유무역협정(FTA)의 ‘무역과 지속가능발전 장(章)’에 규정된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고 있다며 분쟁 해결을 위한 전문가 패널 소집을 요구했다. 현재 전문가 패널이 설치된 상태다.
EU의 전문가 패널 설치 요구는 한국에 대해 지속적으로 FTA 협정을 제대로 이행하라고 촉구해온 유럽의회와 현지 시민단체의 압박에서 비롯됐다. 유럽의회의 경우 2017년 5월 한·EU FTA 이행보고서 채택 당시 한국의 핵심 협약 비준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양자 간 교역 확대를 유보할 것을 주문했다.
지난달 30일 열린 한·EU 화상 정상회담에서도 EU 측은 우리나라에 ILO 핵심협약 비준을 거듭 촉구했다. 그만큼 EU가 한국의 ILO 미비준을 심각한 사안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전문가 패널의 심리는 '코로나 팬데믹(대유행)' 여파로 개시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심리 진행지인 스위스에서 이달 20일 한국에 대한 입국 제한 완화 결정을 내리면 곧바로 심리가 진행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연내 전문가 패널이 한국의 ILO 핵심 협약 미비준이 FTA 규정 위반이라는 판단을 내릴 경우 EU가 대(對)한국 제재에 나설 공산이 높다.
남궁준 한국노동연구원 부연구위원은 "한·EU FTA 상 한국에 직접적으로 관세 조치를 가하는 것은 어렵지만 EU가 향후 우리나라의 통상 협상에서 핵심협약 미비준에 따른 FTA 규정 위반을 지렛대로 삼는 등 사실상 불이익을 주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다"고 말했다. 또 EU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다른 국가에서도 한국에 비슷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럴 경우 코로나19에 따른 글로벌 경기 침체와 미중 무역분쟁 격화 등으로 올해 3~6월 4개월 연속 감소세를 이어 가고 있는 우리 수출로선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할 수밖에 없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작년 전체 수출(5424억 달러)에서 대 EU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약 10%로 중국(25%), 아세안(18%), 미국(14%) 다음으로 많다. 올해 1~6월 누적 대 EU 수출은 204억 달러로 전년보다 11.5%나 줄어든 상태다.
남궁 부연구위원은 “EU와의 노동 관련 현 분쟁에서의 패소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전문가 패널이 최종 판단을 내리 전에 국회가 비준안을 처리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