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대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인 대만 TSMC가 미국 정부의 사실상 금수 조치 강화를 이유로 화웨이의 신규 발주를 거절했다고 18일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닛케이)이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미국 정부는 지난 15일 제3국 반도체 업체들도 자국 기술을 부분적으로 활용했을 경우 화웨이에 대한 수출을 금지하도록 하는 새로운 제재를 발표했다.
화웨이는 이 발표가 있은 지 사흘 만에 TSMC에 7억 달러(약 8625억 원)어치의 반도체를 긴급 발주했는데, 이를 TSMC가 거부한 것이다.
화웨이가 이미 주문한 물량은 TSMC가 9월 중순까지 정상적으로 출하할 수 있지만, 신규 주문에 대해서는 수출할 때마다 미국 정부의 허가가 필요하다.
미국 정부는 지난해 5월 국가안보를 이유로 화웨이를 대상으로 사실상 금수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미국의 기술과 소프트웨어 활용도가 제품 전체에서 25% 이하이면 규제 대상에서 제외되는 등의 허점이 있었는데 이번에 아예 이런 제한도 없애 버린 것이다.
화웨이는 핵심 반도체를 조달할 수 있는 길이 대부분 끊기면서 차세대 이동통신인 5G용 스마트폰 개발 등에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됐다.
이는 단지 화웨이만의 문제가 아니다. 닛케이는 기술 패권을 둘러싼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심화하는 가운데 글로벌 공급망의 균열이 더 뚜렷해졌다고 우려했다.
TSMC는 닛케이에 “고객의 주문과 관련한 내용은 공개하지 않는다”며 “우리는 법률과 규정을 항상 준수하고 있다”고 원론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TSMC의 최첨단 반도체 제조 공정에서는 반도체 장비 부문 세계 1위 업체인 어플라이드머티어리얼즈(AMAT) 등 미국 제품이 필수적이다. TSMC는 15일 미국 정부의 규제 발표 직후 “외부 변호사와 새 규제를 분석할 것”이라며 여운을 남겼지만, 미국의 고강도 제재를 위반할 수도 있는 리스크를 회피하기 위해 화웨이와의 거래 중단을 선택한 것이라고 닛케이는 풀이했다.
화웨이 입장에서 TSMC와의 거래는 매우 중요하다. 화웨이는 반도체 설계·개발 대기업인 하이실리콘을 자회사로 거느리고 있다. 하이실리콘은 스마트폰의 두뇌에 해당하는 중앙처리장치(CPU)와 5G 기지국용 반도체 설계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력을 보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하이실리콘은 반도체를 직접 생산하지 않아 화웨이는 그동안 TSMC에 의존해왔다.
시진핑 국가주석 등 중국 지도부는 미국과의 첨단기술 패권 전쟁에서 고급 반도체 제조 기술 결여를 가장 큰 약점으로 보고 반도체 국산화를 뜻하는 ‘반도체 굴기’ 정책을 추진해왔다. 그러나 세계 일류 수준을 따라잡기에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전 세계에서 현재 10나노미터 이하의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을 보유한 곳은 삼성전자와 TSMC, 인텔 등 3곳에 불과하다고 강조했다. 이런 가운데 TSMC가 화웨이와 거래를 차단하면 그만큼 반도체 굴기는 요원해진다.
한편 중국도 화웨이에 대한 제재 강화에 보복을 천명한 상태여서 미·중의 대립이 격화하면 전 세계 반도체 공급망이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다고 닛케이는 경종을 울렸다.
‘중국 공산당의 입’으로 불리는 환구시보는 15일 사설에서 “중국 정부는 반드시 보복한다”며 “미국 기업의 반도체 부품과 장비가 중국에 수입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TSMC도 타격이 불가피하다. 미국 고객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약 60%에 이른다. 그러나 최근에는 화웨이 비중이 10~20%로 커지면서 애플에 이어 TSMC의 2위 고객사로 부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