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떼의 경제학] "삐삐쳐"…스마트폰 없던 시절, 우린 '삐삐'로 연락했다

입력 2020-02-24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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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떼의 경제학'은 과거에 유행했던 제품을 조망한 코너입니다. 경제적 규모는 물론 재미있는 이야기를 찾아 소개하겠습니다.

▲'삐삐'라고 불리는 무선호출기(Numeric pager).  (게티이미지뱅크)
▲'삐삐'라고 불리는 무선호출기(Numeric pager). (게티이미지뱅크)

"너 끝나면 삐삐"

"일부러 피하는 거니 삐삐쳐도 아무 소식 없는 너" (1998년에 발매된 가수 쿨의 노래 '애상' 가사 일부)

'삐삐'는 요즘 10대와 20대에게 아이유 노래 제목으로 친숙하지만, 예전에는 직장인과 학생들이 집 밖을 나갈 때 들고 다닌 아이템이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삐삐는 애인과 친구들의 공백을 메워준 통신기기다. 노래 가사에 심심찮게 등장했고, 연애 수단이자 소통의 도구로 활발히 사용됐다.

일부 10대 청소년은 학교에서도 삐삐를 사용했다. 이 때문에 '청소년이 삐삐를 쓰는 게 바람직하냐'를 두고 사회적 논쟁까지 벌어졌다. 이처럼 삐삐를 빼놓고 90년대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여러모로 크게 화제가 된 녀석이다.

(박서준 인턴기자 yahoo1221@)
(박서준 인턴기자 yahoo1221@)

◇삐삐…"넌 대체 누구냐?"

삐삐라고 부르지만, 공식 명칭은 이게 아니다. 제품의 이름은 '무선호출기(Numeric pager)'였지만, 숫자를 수신하면 '삐삐' 소리가 난다고 해서 삐삐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별칭이 본래 이름보다 간편하고 직관적이라 대중적으로 쓰인 셈이다.

삐삐는 다른 사람의 메시지나 전화번호를 보고 그 사람에게 다시 연락해주기 위한 도구다. 스마트폰과 달리 메시지를 보낼 수는 없고 수신만 된다. 기기가 매우 작다. 한 줄에 많아야 20자만 표기되는 정도. 전화번호나 메시지만 간략하게 나온다. 이를 본 뒤에 근처 공중전화로 달려가 발신자에게 연락했다. 공중전화를 쓰기 위해 긴 줄이 만들어진 것도 삐삐 때문이다.

전달하는 메시지가 짧다는 게 삐삐의 한계지만 덕분에 재밌는 문자기호들이 많이 탄생했다. 숫자만으로 특정 의미를 전달하는 문화가 생겼다. '삐삐 용어'라고 불리는 메시지가 유행했고, 이를 모은 책이 출간되기도 했다. 가령, '223은 둘이서', 8282는 빨리빨리', '0027은 땡땡이 침'이 있다. 0024(영원히 사랑해), 045(빵 사와), 1254(이리 오소)역시 많이 쓰인 용어다.

◇사용자 무려 2000만 명…제조업 성장 역할도 '톡톡'

삐삐는 오늘날 스마트폰처럼 사람들의 주머니를 차지했다. 1983년 서비스를 시작할 때는 의사, 군인, 국가기관 요원 등 소수의 고소득 직종이나 특수 직종만 사용했다. 그러다 9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보편화했다. 1997년에는 2000만 명의 사용자가 있다는 통계도 있다. 한국 인구가 4500만 명이었을 때다. 이동 통신계의 이정표를 작성한 셈이다.

많은 사람이 쓸 수 있었던 요인은 단연 접근성이다. 가격이 저렴해 큰 부담이 없었다. 기기가 비싸 봐야 5만~10만 원선이어서 지갑이 가벼운 학생이나 사회 초년생이 돈이 없어 구매를 주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요금은 2000~4000원 수준. 때문에 돌아다니는 일이 많은 직장인, 친구들과 활발히 소통하려는 학생들이 구매했다.

삐삐가 인기를 끌자 관련 기업도 가파르게 성장했다. '베가(VEGA)'와 '스카이(SKY)'라는 휴대전화를 만든 제조사 '팬택' 역시 시작은 삐삐였다. 직원 6명에 불과했던 작은 벤처기업 팬택은 삐삐의 유행에 힘입어 창업 10년 만에 직원 2000여 명, 연 매출 1조 원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후 이동 통신의 흐름이 삐삐에서 휴대전화로 넘어가면서 주력 품목도 바뀌었다.

폴더폰 시대를 겪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모토로라'도 마찬가지다. 95년, 국내에서 모토로라가 140만대의 삐삐를 팔면서 시장점유율 36%를 지켰다. 그 뒤를 삼성전자 110만대(28%), 현대전자 53만대(13%), LG 정보통신 40만대(10%)가 뒤를 이었다.

▲스마트폰을 보는 것처럼 90년대는 삐삐를 확인하는 일이 많았다. (출처=응답하라1994 화면 캡처)
▲스마트폰을 보는 것처럼 90년대는 삐삐를 확인하는 일이 많았다. (출처=응답하라1994 화면 캡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삐삐…일본은 장례식까지 치러

정상에서 누린 인기와 관심은 시대가 변하면서 점차 사그라들었다. 2000년대 들어 휴대전화가 빠르게 보급되면서 주머니 자리를 내줬다. 수신만 할 수 있는 한 방향 통신기기보단,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쌍방향 통신기기인 휴대전화가 소통하기에 더 편했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에서 삐삐는 의료기관과 원격 검침 등의 특수 용도로만 사용된다. 휴대전화로 완전히 세대교체가 끝난 2009년 기준으로 삐삐 사용 인구가 약 4만3000명으로 조사된 만큼, 현재는 훨씬 적은 수의 사용자가 있을 것으로 관측된다.

일본 역시 삐삐 사용이 줄면서 지난해 9월 30일부로 서비스를 완전히 종료했다. 2019년 들어 사용자가 1500명만 남게 되자 서비스를 전격 종료한 것.

이를 아쉬워하는 사람들은 독특한 장례식을 열었다. 전자상가가 밀집한 도쿄 아키하바라 역 인근에서 도쿄 장제(葬祭) 협동조합이 주최한 '삐삐 장례식'이 열린 것. 2시간 30분 가까이 진행된 행사에는 아키하바라를 찾은 고객 등을 포함해 약 300명이 참가했다. 영정으로 쓰인 커다란 삐삐 사진에는 ‘1141064(아이시테루요·사랑해요)’라는 숫자가 표시됐다.

방문객들은 하얀 카네이션을 헌화한 뒤 머리를 숙였는데 일부 방문객은 흐느껴 울었다고 아사히신문은 보도했다. 조합 측은 "장례식을 해서 좋았다. 장의사로서 과분할 정도로 고맙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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