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부당한 수출규제에서 시작한 한일 경제 분쟁이 오히려 대(對)일본 무역수지 적자를 큰 폭으로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16년 만에 최저치가 확실시된다.
올해 들어 글로벌 업황 부진을 겪고 있는 반도체 기업의 장비 수입 감축과 국제유가 하락에 따른 석유화학 수입액 감소 등의 영향도 있지만, ‘NO 재팬’으로 불리는 일본제 불매 운동으로 소비재 수입이 줄어든 영향이 크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가 일본의 수출규제를 계기로 추진 중인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 경쟁력 강화 대책이 성공할 경우 장기적으로 대일 무역수지의 큰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기대다.
18일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무역협회 등에 따르면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대(對)일본 무역수지 적자는 163억66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206억1400만 달러)보다 20.6%나 줄었다.
역대 1∼10월 기준으로 보면 2003년(155억6600만 달러) 이후 가장 적은 적자다.
이런 추세라면 2003년(190억3700만 달러) 이후 16년 만에 처음으로 연간 대일 무역적자가 200억 달러를 밑돌게 된다. 역대 최고치였던 2010년(361억2000만 달러)의 절반 수준에 그치는 셈이다.
한국의 10대 무역 상대국 가운데 올해 무역역조를 보이는 나라는 일본과 대만밖에 없다. 대만에 대해서는 올 3분기까지 무역적자가 2000만 달러도 채 되지 않아 일본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대일 무역역조가 ‘개선’된 것은 수입 감소 폭이 수출을 크게 웃돌았기 때문이다.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최근 “(일본의 수출규제 이후) 우리가 일본으로 수출하는 물량이 줄었지만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물량이 훨씬 더 많이 줄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실제로 올해 10월까지 대일 수출액은 237억4600만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5% 줄어드는 데 그쳤으나 수입액은 401억1100만 달러로 12.8%나 감소했다. 올해 일본산 수입 감소율은 2015년(14.7%) 이후 최고치를 기록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메모리 업황 부진을 반영해 시설 투자를 조절하면서 일본산에 상당 부분 의존하고 있는 반도체 부품·장비 수입을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일본제 불매운동으로 자동차, 의류, 주류, 전자제품 등 주요 소비재의 수입도 큰 폭으로 줄었다. 7월 이후 일본 브랜드 자동차 판매는 지난해 같은 기간의 절반 수준에도 못 미쳤다.
전문가들은 내년 반도체 업황이 회복될 경우 대일 무역적자는 다시 증가세로 돌아설 가능성이 크지만, 중·장기적으로는 대일 무역환경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을 하고 있다.
무역협회 문병기 수석연구원은 “일본 수출규제 이후 소재·부품·장비 산업의 중요성에 대한 정부와 민간의 인식이 높아졌다”며 “단기간 내에 큰 성과를 기대하기는 어렵겠지만 이를 계기로 고질적인 대일 무역역조의 흐름이 바뀔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정부 관계자는 “결과적으로 일본의 수출규제는 한국에 좋은 ‘보약’이 됐고, 일본은 ‘제 발등을 찍은 셈’이 됐다”며 “그러나 여전히 불확실성이 크기 때문에 차분하게 대응하면서 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해 계속 노력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