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엔 어디갈래] 고종이 꿈꾼 미래 도시는?…현대미술 품은 덕수궁

입력 2019-09-2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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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과 현대건축의 만남, 국내외 5명 건축가 설치 작품 전시

▲OBBA ' 대한연향' 야간 전경.(사진제공=이하 국립현대미술관)
▲OBBA ' 대한연향' 야간 전경.(사진제공=이하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이 현대미술을 품었다. 고궁에서 펼치는 현대미술 건축전 '덕수궁-서울 야외 프로젝트 : 기억된 미래'가 개막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덕수궁관리소 주최로 열리는 이 전시회는 2012년과 2017년 고궁에서 펼치는 현대미술의 향연으로 호평을 받은 바 있다. 지난해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와 격년제 정례전시 협약을 맺고 공동주최로 처음 열리는 전시다.

전시는 고종황제의 서거와 3·1 운동이 있었던 1919년으로부터 100년이 흐른 2019년, 대한제국 시기에 가졌던 미래 도시를 향한 꿈들을 현대 건축가들의 시각과 상상으로 풀어낸다. 특히 '개항'과 '근대화'라는 역사적 맥락을 같이하는 아시아 주축 건축가들이 한국의 살아있는 근대문화유산을 배경으로 새로운 작품을 구상, 연출, 설치했다.

▲스페이스 파퓰러 '밝은 빛들의 문' 설치 전경.
▲스페이스 파퓰러 '밝은 빛들의 문' 설치 전경.

◇ 단청에서 출발한 빛의 문 = 태국에서 처음 디자인 회사를 설립해 지금은 세계 여러 곳을 무대로 활동하는 스페이스 파퓰러(라라 레스메스, 프레드리크 헬베리)는 덕수궁 광명문에 '밝은 빛들의 문'을 선보인다. 광명문의 이름에서 영감을 얻어 빛의 스크린을 설치하고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가상의 공간을 연출한다. 작가들은 한국의 단청 보수 전문가와 워크숍 등을 통해 단청 패턴에 관심을 갖고 약 7개월간 작품을 구상했다.

광명문의 중앙 출입구를 액자 삼은 밝은 전자 빛의 문을 통해 가상의 공간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디지털 스크린 시대 속 건축의 변화하는 역할에 대해 질문한다. 아름다운 석재와 정교한 기둥, 화려한 처마 등으로 대표되는 왕궁의 건축은 공명정대한 통치라는 이상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매체의 기능을 했다. 일제 점령기에 덕수궁이 그 지위를 잃을 무렵, 건축은 국제주의의 현대식 건물로 더는 장식적 의사소통을 하지 않게 됐다.

▲'밝은 빛들의 문' 전체 모습.
▲'밝은 빛들의 문' 전체 모습.

매체는 이제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인터페이스가 아니며,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을 거쳐 오늘날 주머니에 들어오는 크기가 됐다. 이를 통해 저마다 자신의 궁에서 지배자 노릇을 한다. 그 궁의 문은 하나로 연결된 디지털 세상의 플랫폼과 인터페이스이며, 대중에게 열려있는 것이다. 작품은 이처럼 픽셀로 장식된 우리 시대의 '밝은 빛들의 문'을 통해 새로운 궁으로 들어서는 길을 열고 있다.

▲CL3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 설치 전경.
▲CL3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 설치 전경.

◇ 당신도 대한제국 황제의 가구에 앉을 수 있습니다 = 고종황제의 침전이던 함녕전 앞마당에는 홍콩 건축가 CL3(윌리엄 림)의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가 설치된다. 황실의 가마와 가구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는 샤를로트 페리앙(Charlotte Perriand)의 라운지 의자 등 20세기 서구에서 실험됐던 가구의 형태들과 조합해 6개의 가구 유형을 디자인했다. 관람객들은 마당에 배치된 가구들에 직접 앉아보며 동서양이 만나던 대한제국의 황제의 일상적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가구들.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가구들.

황제의 침전으로 주로 쓰였던 함녕전은 고위 관원들과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곳으로 쓰이기도 했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이 왕에서 황제로, 나라 안을 향한 사고는 서구를 향한 개방으로 중첩과 전환이 일어난 점에 주목한 건축가는 건축적으로 건물과 건물 사이의 전환 공간인 안뜰에 흥미를 가졌다. 전환기의 황제를 위해 디자인한 바퀴 달린 가구를 통해 이동성과 변위, 융통성 개념을 탐구한다.

◇ 오색빛으로 물든 덕수궁 앞 연회장 = 덕수궁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동양과 서양이 만나는 장소적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산자락 아래 터를 잡은 다른 궁과 달리 도심 한복판 고층 빌딩 숲 사이에 자리한 덕수궁 내에는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석조건축이 공존한다. 1902년 중화전 앞마당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전통 연회가 열렸다. '고종임인진연도8폭병풍'(1902)에 기록되기도 한 이 연향으로 황실의 권위를 세우고자 했던 고종의 의지를 추측할 수 있다.

▲덕수궁이 오색빛으로 빛난다.
▲덕수궁이 오색빛으로 빛난다.

국가의 주요 의례를 치렀던 상징적 공간인 중화전 앞마당에서 오색 반사필름으로 시시각각 바람에 반응하는 이 작품은 빛을 산란시키고, 동시에 춤추듯 화려한 색의 그림자를 바닥에 드리운다. 작품은 또 다른 충돌을 위한 매개체로써, 빛과 바람의 충돌을 통해 반사와 투과를 끊임없이 반복하며 매 순간 새로운 풍경을 자아낸다. OBBA(곽상준, 이소정)는 연향에 사용됐던 가리개인 만인산, 천인산 등 공간을 새로이 창출했던 '변화 가능성'의 장치들에 주목했다. 작가는 이를 통해 유연한 사고, 가치, 공간을 암시한다.

▲설치물 안에서 셀카를 찍어도 좋다.
▲설치물 안에서 셀카를 찍어도 좋다.

▲뷰로 스펙타큘러 '미래의 고고학자'.
▲뷰로 스펙타큘러 '미래의 고고학자'.

◇ 계단이 만든 시간, 공간이 만든 봄 = 석조전 분수대 앞에는 대만계 캐나다 건축가이자 2014년 베니스 건축 비엔날레 대만관의 대표작가인 뷰로 스펙타큘러(히메네즈 라이)가 '미래의 고고학자'라는 작품을 통해 관객들을 만난다. 작가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먼지가 쌓여 단층을 만들 듯, 수 세기 후 지면과 우리와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보여준다. 관람객들은 솟은 평면들을 연결한 계단을 올라 수세기 뒤 미래의 한 시점에 도달하고 발 아래 2019년을 과거로서 바라보게 된다.

덕수궁관에 이어 서울관의 미술관 마당에는 서울시 공공건축가로 활동 중인 오브라 아키텍츠(제니퍼 리, 파블로 카스트로)의 120㎡(약 36평) 초대형 파빌리온 온실, '영원한 봄'이 11일 공개됐다. 가을과 겨울 전시기간 동안 봄의 온도 항상성을 유지하는 온실로, 파빌리온을 덮은 투명 반구체들을 통해 빛이 실내를 환하게 밝힌다. 작품명은 자유롭고 공정한 사회를 지향해 온 인류 역사가 '프라하의 봄', '아랍의 봄'등 봄으로 불리는 시적인 은유에서 착안했다. 동시에 작가는 오늘날 전 지구적 문제로 떠오르는 기후변화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화두를 던진다.

▲오브라 아키텍츠 '영원한 봄' 외관.
▲오브라 아키텍츠 '영원한 봄' 외관.

전시기간 중 큐레이터와 건축가들의 토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27일에는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을 기념한 미술관 장터 '국립현대미술관x마르쉐@'가 '영원한 봄' 파빌리온 내·외부에서 열린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덕수궁 프로젝트'는 첫 회인 2012년에 35만 명, 2017년에는 90만 명이라는 관람객 수를 기록한 만큼 올해에도 폭발적 반응을 기대한다"라며 "세계적인 현대 건축가들의 유연한 건축정신과 살아있는 한국 문화유산의 융합을 통해 국내·외 관객들에게 새로운 미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자세한 정보는 국립현대미술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원한 봄' 내부.
▲'영원한 봄' 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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