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대표적인 예로 과거 사회주의 정권하의 폴란드를 생각할 수 있다. 폴란드 사회주의 정권의 폭정과 공포정치에 대항했던 존재는 바로 자유노조(Solidarnosc)였다. 자유노조가 생기기 전까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의 노동조합은 대부분 국가 소속이었다. 그런데 이런 노조는 모두 어용노조였다. 이런 현실에 맞선이가 바로 바웬사였다. 조선소 전기공으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한 바웬사는 노동자의 요구 조건이 공산당에 의해 몇 차례 거부되자 정부와 당으로부터 자유로운, 민주적 노동조합 건설을 위해 나섰다.
결정적인 계기는 1980년 폴란드 식료품 가격의 급등이었다. 당시 바웬사는 이런 국민들의 불만을 발판으로 파업을 주도했는데, 그가 주도한 파업은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이런 조직적 불만 표현에 겁먹은 폴란드 정부는 같은 해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자유노조를 합법화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폴란드 정부가 입장을 바꿔 자유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한 것이다. 폴란드 사회주의 정권은 자유노조를 다시 불법 조직으로 규정하고, 자유노조 운동의 지도자 바웬사를 11개월 동안 구금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이들 노조가 추구하던 노선이 시장경제와 반(反)소련주의, 반(反)사회주의였다는 점이다.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당시 사회주의 정권은 ‘보수’였고, 반사회주의를 주장하던 자유노조는 ‘진보’였다. 진보와 보수는 일종의 변증법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는 사례다.
동유럽 사회주의 정권이 몰락하고 바웬사가 정권을 잡자 바웬사 역시 인기 폭락을 경험하게 된다. 이 역시 바로 진보와 보수의 변증법적 변화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즉, ‘보수’인 사회주의 정권하에서 ‘진보’였던 바웬사 역시 정권을 획득하자 기득권을 가진 ‘보수’가 됐고, 그래서 또 다른 ‘진보 세력’의 도전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는 ‘좌파’와 ‘우파’와 같이 변하지 않는 이념적 개념과는 다르다.
이는 당연히 우리나라에도 적용된다. 더불어민주당은 요새 진보에 등 돌린 20대 남성들의 지지를 다시 얻기 위해 상당히 고민하는 모양이다.
등 돌린 20대 남성들을 두고, 더불어민주당 설훈 최고위원은 ‘교육의 문제’라는 주장도 펼쳤지만, 이는 정확한 분석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정권에 대한 20대들의 이반(離叛) 현상이 교육 때문이라는 입장을 가진 이들은, 우파 정권하의 ‘반공 교육’이 문제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만, 이는 지극히 계몽주의적 인식이다.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을 직접 경험한 세대를 두고, 반공 교육 때문에 보수적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오히려 지금 20대들이 진보이기 때문에 현 정권에 등을 돌리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지금 정권 담당자들이야 스스로를 진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자신들을 ‘절대 선’이라고 스스로 규정하겠지만, 기득권화된 진보는 진보가 아니라 보수임을 자각해야 한다. 이를 자각하지 못한다면 이들은 영원히 자신들의 프레임에 갇혀 헤어 나오지 못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계속 오판을 거듭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현 정권은 보수이고 현 정권에 반대하는 20대들은 진짜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이들 20대들이 정권에 반대하는 것은 ‘기득권화된 자칭 진보’에 저항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존하는 권력에 저항하는 것, 기득권 계급에 저항하는 것은 젊은이들이 당연히 가져야 하는 사고다. 그래서 현 집권 세력들이 이들 20대들의 지지를 다시 받고 싶어 한다면, 자신들이 보수임을 인정해야 하고, 이런 인식을 바탕으로 진보를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 없이, 다음 총선에서 ‘260석 싹쓸이’ 운운하는 것을 보면 답답함을 넘어 우울하기까지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