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과학이론 철학자인 칼 포퍼(Karl R. Popper)는 그의 저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The Open Society and Its Enemies)’에서 세상일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소수가 이끌어가는 사회보다는 다수의 사람들이 각자 알고 있는 것을 자유롭게 교환하면서 사회 전체에 관해 함께 논의하는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한계와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하면서, 어떤 사람도 결코 절대적 지식을 가질 수 없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열린 사회는 상호 존중과 소통을 통해 일구어 낼 수 있다는 정치 철학이다.
2005년 방사성 폐기물 처분장 부지 선정이라는 오래된 미해결 국책 과제를 풀어 가면서 ‘국가의 목표가 개인의 자유보다 우선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가졌던 적이 있다. 결국 주민투표 방식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면서 열린 사회로 가는 길만이 멀게 보이지만 가장 가까운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상반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영리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공동체가 같이 호흡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한다는 취지로 운영되고 있는 카페 앞의 불법 주차된 차량들이 다른 사람들의 교통을 방해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그리고 사회의 기본 질서라는 ‘약속’에 대해 생각해 본다.
우리는 가끔 일본의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문화’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도, 법 질서 준수 운운하는 것을 빛바랜 국가주의와 동일시 혹은 유사시하곤 한다. 물론 법과 제도가 인간의 기본적인 권한이나 자유와 배치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에 맹목적 법률 우선주의를 경계해야 하지만, 일상의 생활에서 지켜야 하는 ‘약속’의 이행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다.
적어도 우리 일상의 삶에서 정답은 이쪽에도 저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우리가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점이 열린 사회이고, 그 열린 사회의 구성원 모두가 상대방의 생각을 존중한다면 우리는 개인주의와 전체주의의 중간 어딘가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개개인의 자율적인 생각과 행동을 존중하면서 법과 제도라는 현존하는 약속에 대하여는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상대방을 존중하는 관용을 가지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약속을 준수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불이익마저도 기꺼이 감수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다.
인류는 1만 년의 역사에서 많은 변화와 진보를 만들어 왔다. 이러한 역사의 진보는 특별하게 뛰어난 선구자의 ‘이끌어 감’이 있어서만 가능했다고 보기 어렵다. ‘이끌어 감’에 대한 무조건적인 ‘따름’만 있는 사회는 정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오히려 그에 대한 ‘저항과 반작용’이 있는 사회가 새로운 단계로의 진보를 이루어 왔다. 진보된 사회는 현상적으로 나타난 모습만을 본다면 이끌어 가려는 방향과, 저항·반작용의 방향의 중간 어딘가에 있다. 목재에서 석유와 석탄 등 화석연료 그리고 원자력에 이어 태양과 바람이라는 자연 에너지로 변화돼 가는 에너지의 역사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올해는 무술(戊戌)년, 개의 해이다. 우리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가 그보다 체격조건도 좋고 일찍이 유라시아 대륙을 선점했던 네안데르탈인을 몰아내고 지구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이유 중의 하나가 개를 사육해 인간의 동반자로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더불어 같이하는 것만이 진보의 전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은 견강부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