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 신형 원전인 ‘APR 1400’의 유럽 수출형 모델인 ‘EU-APR’가 유럽연합(EU)의 공식 인증을 받아 수출 길이 열렸지만, 탈(脫)원전 정책을 추진 중인 정부는 한발 뒤로 빠져 있다.
‘EU-APR’의 표준설계가 유럽사업자요건(EUR) 인증 본심사를 통과한 것은 유럽 수출의 교두보를 확보한 것으로 의미가 크다. 한국은 프랑스, 러시아, 미국, 일본에 이어 다섯 번째로 EUR 인증을 받은 나라가 됐다.
하지만 원전 정책을 책임지고 있는 산업통상자원부는 이와 관련한 보도자료도 내지 않고 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유럽사업자협회의 편지를 받고 9일 관련 자료를 낸 것이 전부다.
이번 유럽 인증은 유럽권 건설사업의 표준 입찰요건으로 한국의 원전 수출에 호재다. 인증에 통과했다고 당장 수출 길이 열리는 건 아니지만, 영국, 체코, 스웨덴, 폴란드 등 기존 원전을 대체할 신규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EUR 요건을 요구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 이집트 등에서도 원전 수주 가능성이 높아졌다. 경쟁 노형인 프랑스의 EPR와 미국 AP1000은 아직 상업운전에 착수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영국 정부가 추진 중인 20조 원 규모의 무어사이드 원전에 한국형 모델 채택에도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EU-APR 표준설계는 건설 재개 여부에 대해 공론화 중인 신고리 5ㆍ6호기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에 건설 중인 APR1400을 유럽 안전기준에 맞춰 개발한 것이다.
그동안 신고리 5·6호기 공사 중단을 반대하는 측에서는 한국의 탈원전 흐름이 원전 수출에 이미지 타격 등 악영향을 줄 것이라고 우려해왔다. 또한, 정부가 수출을 지원할 의사가 정말로 있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산업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수익성과 리스크를 엄격히 따져서 국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원전 수출을 적극 지원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산업부는 10일 백운규 장관 주재로 원전수출전략협의회를 개최한다.
하지만 입찰에 참가하더라도 현재 분위기라면 수주가 어렵지 않냐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고리 건설 중단 반대 측인 정용훈 카이스트 교수는 “원전 발주국에서 주로 고려하는 것은 미국과 유럽에서 통하는 것인지와 입찰국이 원전을 짓느냐는 것이다. 첫 번째 요건은 이번에 충족됐지만 두 번째 요건은 탈원전 방침에 따라 충족하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면서 “원전 수출에는 금융지원이 필수적인데 이 역시 이번 정부에서는 의문”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