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렝 드 보통(Alain de Botton)의 신작 소설이 올봄 출간됐다. 영문명으로는 ‘The Course of Love’. 우리나라에서는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이라고 번역돼 소개된 이 책은 젊은 연인에게는 어려워서 집중해 읽어야 한다는 후기가 가득한 반면 결혼을 경험한 40대 유부(有婦)들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공감과 위안을 주기에 충분하다. 작가의 문체가 그러하듯이 연애와 결혼, 그리고 외도와 미래에 대한 독자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의 경험적 일화와 심리학적 에세이 투는 잘 맞아떨어진다.
스무 해 이상을 따로 살아온 남녀가 자기 삶의 극히 일부라도 내어줘야만 비로소 서로를 알아갈 수 있기에 결혼은 삶에 있어서는 결과가 아닌 지극히 기초적인 시작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둘 다 제정신이 아닌 상태라고 명명돼 미래에 대해 무한히 낙관적인, 기이한 행동을 하는 것이 바로 결혼이라고 설명한다.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이다.”(p18)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p65) “결혼: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p237) “결혼한 지는 16년이 되었지만 이제야 좀 늦게 라비는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낀다.”(p277)
뒤통수를 한 방 세게 맞은 듯하다. 결혼이라는 것이 사랑의 결실이 아닌 ‘시작’이라는 말에 극도로 공감한다. 그의 말처럼 완벽한 결혼은 없고, 어지간히 좋은 결혼만이 있다는 사실을 진작에 알았더라면 누구든 좀 더 나은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오답노트를 만들 듯 공감이 피어날 때는 이미 때늦은 복습의 시간일 텐데 ‘어지간히’ 좋은 결혼에 충실하며 ‘어지간히’ 살아갈 용기는 우리에게 없었던 걸까? 아니면 인간의 욕심이 결혼 당사자인 서로에게만큼은 과하게 적용된 것일까?
“우리가 익혀두어야 할 것은 우리가 한두 가지 면에서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쾌히 인정할 줄 아는 간헐적인 능력이다.”(P116) 나만 특출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옳거나 합리적이라는 자의식(自意識)이 얼마나 자신을 옭아매는지 그 허울에서 우리는 빠져나와야 살아가기 편하다. 다소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나면 잘못인 것도 용서되고 쉬 넘어갈 수 있잖은가. 내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고, 상대의 잘잘못을 일일이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릴 사이라면 애초부터 첫사랑이든 결혼이든 그 싹부터 무지하게 피곤해지기 마련이다. 첫사랑은 처음의 만남을 뜻하는 무미건조한 단어로, 결혼은 사랑의 시작임을 알리는 긴장의 신호탄 정도의 감정적 언어로 치부되면 그저 좋을 일이다.
우리는 완전하지 않다. 완전하지 않기에 실수가 있고, 그 대가로 자기성찰의 시간을 갖는다. 상대가 촉진제 역할을 해줄 수 있으며, 이성(異性)이 아니라도 수많은 예술이 감동과 눈물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 어떤 삶이라도 우울하면서도 재미지고, 힘 빠지면서도 도약하게 된다. 모든 결말을 애써 외면하는 것이 지금에 와서야 현명해 보일 정도로 우리 인생의 끝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다.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없으며 영화의 주인공처럼 그저 ‘끝을 희망하는 것’만이 우리가 잘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신이 우리에게 내어준 재미있는 숙명(宿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