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자국이 주도해 20여 년 전 수립한 세계무역기구(WTO) 체제를 스스로 흔들고 있다. 트럼프 정부는 WTO의 분쟁조정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역보복을 벌일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고 있으며 이는 WTO 체제에서 멀어지려는 첫 번째 단계라고 27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트럼프 정부 관리들은 미국무역대표부(USTR)에 중국과 다른 국가들에 무역제재를 일방적으로 벌일 수 있는 법적 메커니즘 리스트 작성을 요구했다고 FT는 전했다. 한 소식통은 “이들의 목적은 바로 WTO의 분쟁조정시스템 우회 전략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WTO는 지난 1995년 설립 이후 회원국 간 무역분쟁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권위 있는 기관으로 부상했다. 미국은 트럼프 정부 하에서도 여전히 회원국 자격을 유지할 것으로 보이나 최근 움직임은 WTO에 대한 트럼프 정부의 회의적인 시각을 반영한다고 FT는 설명했다.
트럼프는 이전 정권이 미국의 국익에 반하는 국제주의자 관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시각을 갖고 있으며 그의 정부는 보호무역주의자들로 채워졌다. 트럼프는 지난해 대선에서 “WTO는 재앙”이라고 강조했으며 이미 일본과 호주 등 아시아·태평양 국가들이 참여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서 미국을 탈퇴시켰다. 트럼프의 최측근인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 겸 선임고문은 지난주 “TPP 탈퇴는 미국 현대사에서 가장 전환적인 순간 중 하나”라고 말했다.
트럼프는 국제기구와 협정에 종종 경멸을 표시했다. 안보 측면에서는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등이 나서서 트럼프의 발언에 불안해하는 동맹국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무역 방면에서는 트럼프보다 더한 강경 보호무역주의자들이 정부에 대거 포진해 안보 부문과 대조적이라고 FT는 평가했다.
로버트 라이시저 USTR 대표 내정자는 미국이 보호무역주의를 받아들여야 하며 WTO에 좀 더 공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윌버 로스 상무장관 내정자와 피터 나바로 신설 백악관 국가무역위원회(NTC) 위원장은 WTO가 미국을 불공정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불만의 핵심인 ‘트럼프 무역 독트린’ 작성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고 FT는 전했다. 특히 트럼프 정부 고위관료 인준이 아직 끝나지 않아 나바로가 WTO를 흔드는 대안 모색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트럼프의 일방적인 성격의 무역시스템 대안 모색에 우려를 표명했다. 버락 오바마 정부 시절 TPP 협상을 주도했던 웬디 커틀러 전 USTR 부대표는 “미국이 WTO를 우회해 스스로 무역분쟁을 벌이겠다는 신호를 보내면 다른 나라도 가만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며 “무역이 무법천지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다른 전직 미국 관리도 “트럼프 정부의 새 논의는 근시안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면서 “미국 경제를 세계적으로 경쟁력있게 만드는 방법에 중점을 둬야 한다. 우리가 다른 나라도 받아들이도록 유도한 ‘규칙에 기반한 시스템’, 즉 WTO의 리더십을 스스로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