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스님이 무소유를 말하며 난초 이야기를 꺼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어느 날 난초 두 분을 선물 받은 스님은 정성을 다해 길렀다. 그런데 난초를 뜰에 내놓는 바람에 죽어버린다. 햇볕을 원망할 정도로 안타까웠지만, 무욕해 보이는 난 기르는 것조차 집착과 소유욕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반성한다. 탐욕을 경계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다.
알베르트 슈바이처(1875.1.14~1965.9.4)는 아프리카에서 의료봉사를 하며 평생 무소유의 삶을 실천한 ‘밀림의 성자’였다. 그는 봉사 활동을 위해 대학교수이자 바흐 오르간 연주의 권위자라는 명성을 버렸고, 평생 모은 재산을 바쳤으며 38세 늦은 나이에 의학을 공부한다.
그는 우연히 아프리카 흑인들의 참상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육체적 고통은 인간에게 가장 절박한 실존’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아프리카로 떠나 람바레네(가봉 공화국)의 유일한 의사가 된다.
하지만 아프리카에서의 의료 활동은 녹록지 않았다. 의료물자가 없어 인세와 오르간 연주 수입으로 조달하고, 진료할 곳이 없어 닭장에서 환자를 봤다. 아내가 의료기구를 관리하며 외과 수술을 도왔고, 매일 30~40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높은 습도와 뜨거운 태양 아래서의 진료도 크나큰 인내를 요구했다. 최악의 의료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상처가 곪아 고생하던 환자가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며 행복해했다. 이런 삶 덕분에 ‘슈바이처’는 진정한 의사의 대명사가 됐다.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는 퇴임 후 집 한 채가 없어, 고신대 의료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준 20여 평 관사에서 살았다. 빈민 구호에 일생을 바친 그는 돈을 따지지 않고 치료부터 해주고, 단 한 번도 선행을 내세우지 않았다. 무소유의 삶은 어렵지만 그래서 더 값진 게 아닐까. 김대환 편집위원 daehoan3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