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초의 문신, 군인, 외교관 서희(徐熙·942~998.8.8)는 우리 역사상 최고 협상가로 통한다. 그는 “싸우지 않고 오로지 세 치 혀로 평화를 가져온 인물”(‘서희, 협상을 말하다’· 김기홍 부산대 경제학과 교수)로 정평이 나 있다.
내의령(현 국무총리)을 역임한 서필이 그의 아버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경기도 이천의 토착 호족이었다. 960년 과거에 급제해 광평원외랑을 지낸 뒤 내의시랑에 올랐다. 요나라가 발해를 멸망시키자 고려는 요에 대해 적대 정책을 폈다. 같은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요나라는 993년 소손녕이 이끄는 80만 대군을 고려에 보내 공격했다. 이에 고려 성종은 서희와 박양유, 최량 등을 보내 맞서게 했으나 패배해 봉산군(청천강 이북 지역)을 내주고 말았다. 성종은 첫 전투에서 지자 이몽전을 보내 화해를 요청했다.
그러나 소손녕은 항복을 요구했다. 이에 신하들이 투항론과 할지(割地)론으로 갈려 논란이 분분하자 서희가 나서 “요나라가 노리는 것은 강화이니 투항론도, 할지론도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의견에 모든 사람이 공감하자 그는 직접 소손녕을 찾아가 담판을 벌였다. 이 담판을 통해 고려는 북쪽 땅을 얻었다.
그는 왕에게 직언을 한 신하였다. 성종이 서경에 가서 몰래 영명사에서 놀이를 즐기려 하자 그는 이를 막았다. 이처럼 직언을 서슴지 않는 신하였으나 성종이 그의 막사를 찾았을 땐 이를 사양하는 등 왕에 대한 예의도 지켰다. 또한 성종이 공빈령 정우현이 ‘시정의 일곱 가지 일’을 얘기한 것에 심기가 상해 그를 쫓아내려 하자 서희는 오히려 정우현의 얘기가 합당한 것이라고 변호했다. 이에 성종은 정우현을 감찰어사로 삼았다. 서희가 996년 병을 얻어 요양하자 성종이 직접 찾아가 위로한 일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