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직후 ‘자본시장 활성화’라는 증권계 원로들의 염원은 쉽사리 이뤄지지 않았다.
1945년 8월 해방 직후 우리나라 주식 중 경성방직, 경성전기, 조선기계, 조선맥주가 상장됐다. 그러나 이 주식의 유통은 우리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시 미군정은 우리나라의 경제 사회적 상황을 고려, 증권시장의 존재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1946년 4월 16일 군정명령 43호로 증권 거래시장이었던 조선증권취인소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국내 증권인들은 1947년 대한증권구락부를 결성해 증권 거래시장 설립을 본격 추진했다. 대한증권구락부는 증권인들의 친목단체였으면 활동 기간은 2년 정도였다. 이 조직은 거래소 대신 국내 첫 증권사이자 증권 중개 기능을 갖춘 대한증권을 설립하면서 국내 자본시장에 숨을 불어 넣었다.
대한증권의 거래소 기능은 역설적으로 한국전쟁 기간에 활성화됐다. 1949년 남한 정부는 농지개혁법을 제정하고 1950년 이를 공표했다. 당시 농지개혁법의 골자는 소작인은 평년수확고의 150%를 5년 동안 현물로 정부에 납부하고 지주에게는 정부가 증권으로 지가를 보상하는 것이었다.
당시 발행된 지가증권은 15억2400만원이었으며 보상을 받은 지주는 16만9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정부가 농지개혁을 시행한 직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많은 피난민이 부산으로 향했다. 당시 부산은 사실상 수도 역할을 했다. 하지만 생활여건은 어려웠다. 기본 재화가 부족했던 것은 물론 화폐가치가 급락하면서 지가증권의 상환 여부도 불투명했다.
이에 생계를 위해 소액소지자들이 헐값에 팔아넘긴 지가증권을 고물상이 사모아 증권업자에 넘기는 경우가 많았다. 자연스레 부산을 중심으로 한 지가증권 거래가 활발해졌다. 그러자 대한증권은 부산사무소를 설치해 지가증권과 국채 거래를 본격 취급했다. 전쟁 발발 직후에는 지가증권의 가치가 급락했지만 이 증권은 정부 귀속재산의 매수대금으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점차 수요도 늘었다.
대한증권이 지가증권 거래에 뛰어들자 한일증권, 고려증권 등이 지가증권을 매매했다. 이들 회사는 증권사 면허가 없었지만 간판만 내걸고 영업을 했다. 전시 상황에서 정부는 증권사 면허 확대를 주저하고 있던 터였다.
이처럼 국내에서 유통이 활발했던 첫 증권은 지가증권이었다. 자본시장 태동을 위한 경제 사회적 분위기가 무르익었다는 것도 지가증권 유통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1954년 지가증권 거래대금은 국채와 주식을 포함, 전체 증권거래 대금의 88%를 차지했다. 증권업협회 출범과 거래소 설립의 단초를 지가증권이 마련한 셈이다.